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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Oct 28. 2024

제대로 삐뚤어진 엄마

오늘 나 건드리지 마라. 다 죽인다.

지난주 금요일.

딸의 영어학원에서 3개월에 한 번 있는 형성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시험을 잘 치고 싶다며(늘 말만..) 거의 처음으로 공부하는 척을 했었다. 학원을 마치고 바로 전화가 와서는 시험을 망친 게 분명하다며 슬프고 기분 나쁘고 짜증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시험을 망칠 거면 나 공부 왜 한 거냐며 한탄하더니(뭘, 얼마나 했는데..?)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내가 집에 그냥 오라고 하면 올 건가? 그래도 말이라도 하고 오는 걸 감사히 여겨야 되나 싶어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저녁을 먹고 10시에 오셨다. 기분이 나쁘니 유튜브를 좀 봐야겠다며 11시 30분까지 유튜브를 보셨다. 그 이후 30분 동안 학교와 학원과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12시가 되어서야 다음날 아침에 가는 수학 학원 숙제를 펼치신다.

몇 문제 풀지도 않고서는 힘들다, 왜 사냐, 학원 다니기 싫다, 숙제가 왜 이렇게 많냐, 어렵다, 이걸 어떻게 다 하냐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나도 할 말이 많다.


숙제 있는지 몰랐냐

학원이 8시에 끝났는데 이때까지 니가 뭐 했냐

너 지금까지 논다고 숙제 안 한건 생각 못 했냐

12시에 숙제 시작하면서 짜증을 내면 어떡하냐

제발 숙제 이렇게 할 거면 학원을 옮기든지 끊든지 해라

노는 건 상관없는데 할 일을 보면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놀아라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격려도, 꾸중도, 칭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참는다. 참는 성격이 아닌데 참아서 또 속이 뒤집어진다. 마침 감기기운에 머리도 아프고, 여기서 짜증받이 하느니 그냥 들어가서 자는 게 낫겠다 싶어 먼저 자러 가도 되냐고 했더니, 좀 전까지 친구 이야기 하면서 깔깔대던 인간이 갑자기 눈빛이 확 바뀌더니 살기를 띤다. "내가 언제 못 자게 했어? 자. 자라고." 하며 갑자기 악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상한 거지?

모르겠다.

지금 따져봐야 싸움밖에 안 나니까, 그냥 들어가서 잔다.


다음날 아침.

기분 나쁜 상태로 잠을 깨서는 그녀의 방문을 여니,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하고 있다.

첫마디.

"기분 나쁘니까, 나가."




나는 뭘 잘못했는가.

와. 저 재수탱이 싸갈탱구.

전 우주에서 나를 가장 막 대하는 유일한 인간.

너무 싫다. 나도 한 성질 하는데.

학교에서는 저런 싸가지들 가만히 두지 않는데.

내 집에서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하니 돌겠다.


학원 가기 전에 밥은 줘야지 싶어 어찌저찌 밥은 차려놓았다. 더 이상 말도 섞기 싫고 꼬라지도 보기 싫어 가방을 챙겨서 나와버렸다. 동네에서 제일 일찍 문을 여는 카페로 갔다.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도 뽑아내고 채로 들고 콸콸 들이켰다.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에서 심한 사춘기 망나니들을 찾아 그걸 보며 위로해 보지만 계속 열불이 차오른다.


내 앞 테이블에 고등학생 바퀴벌레 커플들이 들어와서 앉았다. 여학생은 피곤한 척하며 남친에게 앵앵 대다가 곧 엎드려 퍼져 잤고, 남학생은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로 여친에게 치명적인 척을 몇 번 하더니 수학문제집을 한숨 쉬며 푼다. 곧. 문제가 잘 안 풀리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심각하게 답지를 확인하는데, 그가 풀고 있던 문제집은 <어삼쉬사>였다. 맙소사! 난 또 킬러문제 푸는 줄 알았네. 어삼쉬사는 '어려운 삼점, 쉬운 사점'이라는 뜻이다. 단순 개념확인과 아주 쉬운 계산문제만 모여있는 고등학교 수학의 '구몬수학'같은 문제집이다. 모르면 좋을 텐데, 문제집 수준을 아니까 더 짜증 난다.


한심한 놈.

야. 그거 풀면서 한숨을 쉬냐?

못 풀어서 답지를 보냐?

그게 안 돼서 얼굴을 감싸 쥐냐?


너네 엄마는 너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알고 계시냐?

스카 간다고 하고 왔지?

기껏 어삼쉬사 풀면서 서로 치명적인 척하는 거 알고 계시냐?


기분이 나빠서 그런가 뭐 하나 곱게 보이는 게 없다. 딸한테 뺨 맞고 죄 없는 쟤네들한테 화풀이를 한다. 지척에서 자꾸 서로 유혹하는 꼴이 아주 보기 싫어 죽겠다. 바퀴벌레들. 둘 다 통수 세게 한 대 갈기고 싶다.


나는 삐뚤어졌다. 오늘 나 건드리지 마라. 다 죽인다. 곱게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집에 샌드위치도 맛있었는데 오늘따라 맛도 없다. 나는 그래도 멀쩡한 어른인 척해야 하고 여기서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되니까, 하며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아 본다.


내 옆 테이블에서 딱 듣기 싫은 찡찡거리는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 7살쯤 된 여자아이가 엄마랑 수학문제집을 풀면서 짜증을 내고 있다. 딸내미의 짜증을 듣기 싫어 집을 나왔는데 여기서 남의 딸 짜증을 듣고 있으니 더 화가 난다. 그 집 자식의 진짜 엄마는 더 빡치는지 화를 억누르며 말하는 게 느껴진다. 짜증 내지 말고 조용히 하고 다시 풀어보라는 엄마의 이 앙 다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얘, 아가. 더 해라. 더 심하게 소리쳐.

토요일 아침부터 카페에서 수학 문제집이라니 너네 엄마도 너무한다. 더 시끄럽게 엄마한테 짜증 내. 소리질러. 그래, 잘한다. 너 수학에 관심도 없는 거 같은데 지금부터 난리를 쳐야 엄마도 빨리 포기하지. 너 지금 엄마 못 이기면 계속 수학 공부 해야 된다. 화이팅. 더 해라, 더 크게 소리쳐. ㅋㅋㅋㅋㅋ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렵다, 무슨 말이냐, 못 한다, 이해가 안 간다, 하며 짜증을 더 심하게 내기 시작했다. 내가 응원은 했지만, 조용한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듣기 싫은 앙칼진 짜증소리라 나도 몇 번 째려보고,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줬다. 사람들의 눈치와 딸의 역정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음식도 채 다 못 먹고 우는 애를 데리고 수학책을 챙겨서 황급히 나가버렸다.




아. 이제 조용하다. ㅋㅋㅋㅋㅋㅋㅋ

자식에게 시달리는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보니 뭔가 위안이 되며 마음이 편해진다.

내 집에서 내 발로 나왔는데 쫓겨난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이 살짝 풀어진다.  

저 엄마도 자기 발로 나갔지만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 심심한 위로의 뜻을 텔레파시로 보내본다. 그리고 승질 드러운 딸아이를 키우는 선배 엄마로서 진지하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어머니, 저희 집 애도 그랬어요.

좀 크면 나아질 거 같죠? 더 심해져요. ㅋㅋ

수학 잘하는 애들은 주말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잘 때 자기가 문제집 혼자 푸는 애들이에요.

공부 대강 시키세요.

아직 애도 어린데 주말 아침에 수학 문제집 풀리지 말고 어디 산에나 가서 밤이나 줍고 추억이나 쌓으세요.

ㅋㅋㅋㅋㅋ 


힘들다. 삶이 힘들고.

남 안 되는 꼴 보면서 흐뭇해하는 치졸한 내가 싫다.

삐뚤어진 나 자신이 못나보여 더 힘들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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