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영어학원에서 3개월에 한 번 있는 형성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시험을 잘 치고 싶다며(늘 말만..) 거의 처음으로 공부하는 척을 했었다. 학원을 마치고 바로 전화가 와서는 시험을 망친 게 분명하다며 슬프고 기분 나쁘고 짜증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시험을 망칠 거면 나 공부 왜 한 거냐며 한탄하더니(뭘, 얼마나 했는데..?)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내가 집에 그냥 오라고 하면 올 건가? 그래도 말이라도 하고 오는 걸 감사히 여겨야 되나 싶어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저녁을 먹고 10시에 오셨다. 기분이 나쁘니 유튜브를 좀 봐야겠다며 11시 30분까지 유튜브를 보셨다. 그 이후 30분 동안 학교와 학원과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12시가 되어서야 다음날 아침에 가는 수학 학원 숙제를 펼치신다.
몇 문제 풀지도 않고서는 힘들다, 왜 사냐, 학원 다니기 싫다, 숙제가 왜 이렇게 많냐, 어렵다, 이걸 어떻게 다 하냐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나도 할 말이 많다.
숙제 있는지 몰랐냐
학원이 8시에 끝났는데 이때까지 니가 뭐 했냐
너 지금까지 논다고 숙제 안 한건 생각 못 했냐
12시에 숙제 시작하면서 짜증을 내면 어떡하냐
제발 숙제 이렇게 할 거면 학원을 옮기든지 끊든지 해라
노는 건 상관없는데 할 일을 보면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놀아라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격려도, 꾸중도, 칭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참는다. 참는 성격이 아닌데 참아서 또 속이 뒤집어진다. 마침 감기기운에 머리도 아프고, 여기서 짜증받이 하느니 그냥 들어가서 자는 게 낫겠다 싶어 먼저 자러 가도 되냐고 했더니, 좀 전까지 친구 이야기 하면서 깔깔대던 인간이 갑자기 눈빛이 확 바뀌더니 살기를 띤다. "내가 언제 못 자게 했어? 자. 자라고." 하며 갑자기 악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상한 거지?
모르겠다.
지금 따져봐야 싸움밖에 안 나니까, 그냥 들어가서 잔다.
다음날 아침.
기분 나쁜 상태로 잠을 깨서는 그녀의 방문을 여니,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하고 있다.
첫마디.
"기분 나쁘니까, 나가."
나는 뭘 잘못했는가.
와. 저 재수탱이 싸갈탱구.
전 우주에서 나를 가장 막 대하는 유일한 인간.
너무 싫다. 나도 한 성질 하는데.
학교에서는 저런 싸가지들 가만히 두지 않는데.
내 집에서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하니 돌겠다.
학원 가기 전에 밥은 줘야지 싶어 어찌저찌 밥은 차려놓았다. 더 이상 말도 섞기 싫고 꼬라지도 보기 싫어 가방을 챙겨서 나와버렸다. 동네에서 제일 일찍 문을 여는 카페로 갔다.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도 뽑아내고 컵 채로 들고 콸콸들이켰다.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에서 더 심한 사춘기 망나니들을 찾아 그걸 보며 위로해 보지만 계속 열불이 차오른다.
내 앞 테이블에 고등학생 바퀴벌레 커플들이 들어와서 앉았다. 여학생은 피곤한 척하며 남친에게 앵앵 대다가 곧 엎드려 퍼져 잤고, 남학생은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로 여친에게 치명적인 척을 몇 번 하더니 수학문제집을 한숨 쉬며 푼다. 곧. 문제가 잘 안 풀리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심각하게 답지를 확인하는데, 그가 풀고 있던 문제집은 <어삼쉬사>였다. 맙소사! 난 또 킬러문제 푸는 줄 알았네. 어삼쉬사는 '어려운 삼점, 쉬운 사점'이라는 뜻이다. 단순 개념확인과 아주 쉬운 계산문제만 모여있는 고등학교 수학의 '구몬수학'같은 문제집이다. 모르면 좋을 텐데, 문제집 수준을 아니까 더 짜증 난다.
한심한 놈.
야. 그거 풀면서 한숨을 쉬냐?
못 풀어서 답지를 보냐?
그게 안 돼서 얼굴을 감싸 쥐냐?
너네 엄마는 너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알고 계시냐?
스카 간다고 하고 왔지?
기껏 어삼쉬사 풀면서 서로 치명적인 척하는 거 알고 계시냐?
기분이 나빠서 그런가 뭐 하나 곱게 보이는 게 없다. 딸한테 뺨 맞고 죄 없는 쟤네들한테 화풀이를 한다. 지척에서 자꾸 서로 유혹하는 꼴이 아주 보기 싫어 죽겠다. 바퀴벌레들. 둘 다 통수 세게 한 대 갈기고 싶다.
나는 삐뚤어졌다. 오늘 나 건드리지 마라. 다 죽인다. 곱게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집에 샌드위치도 맛있었는데 오늘따라 맛도 없다. 나는 그래도 멀쩡한 어른인 척해야 하고 여기서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되니까, 하며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아 본다.
내 옆 테이블에서 딱 듣기 싫은 찡찡거리는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 7살쯤 된 여자아이가 엄마랑 수학문제집을 풀면서 짜증을 내고 있다. 딸내미의 짜증을 듣기 싫어 집을 나왔는데 여기서 남의 딸 짜증을 듣고 있으니 더 화가 난다. 그 집 자식의 진짜 엄마는 더 빡치는지 화를 억누르며 말하는 게 느껴진다. 짜증 내지 말고 조용히 하고 다시 풀어보라는 엄마의 이 앙 다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얘, 아가. 더 해라. 더 심하게 소리쳐.
토요일 아침부터 카페에서 수학 문제집이라니 너네 엄마도 너무한다. 더 시끄럽게 엄마한테 짜증 내. 소리질러. 그래, 잘한다. 너 수학에 관심도 없는 거 같은데 지금부터 난리를 쳐야 엄마도 빨리 포기하지. 너 지금 엄마 못 이기면 계속 수학 공부 해야 된다. 화이팅. 더 해라, 더 크게 소리쳐. ㅋㅋㅋㅋㅋ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렵다, 무슨 말이냐, 못 한다, 이해가 안 간다, 하며 짜증을 더 심하게 내기 시작했다. 내가 응원은 했지만, 조용한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듣기 싫은 앙칼진 짜증소리라 나도 몇 번 째려보고,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줬다. 사람들의 눈치와 딸의 역정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음식도 채 다 못 먹고 우는 애를 데리고 수학책을 챙겨서 황급히 나가버렸다.
아. 이제 조용하다. ㅋㅋㅋㅋㅋㅋㅋ
자식에게 시달리는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보니 뭔가 위안이 되며 마음이 편해진다.
내 집에서 내 발로 나왔는데 쫓겨난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이 살짝 풀어진다.
저 엄마도 자기 발로 나갔지만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 심심한 위로의 뜻을 텔레파시로 보내본다. 그리고 승질 드러운 딸아이를 키우는 선배 엄마로서 진지하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어머니, 저희 집 애도 그랬어요.
좀 크면 나아질 거 같죠? 더 심해져요. ㅋㅋ
수학 잘하는 애들은 주말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잘 때 자기가 문제집 혼자 푸는 애들이에요.
공부 대강 시키세요.
아직 애도 어린데 주말 아침에 수학 문제집 풀리지 말고 어디 산에나 가서 밤이나 줍고 추억이나 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