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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Nov 12. 2023

신혼여행 30일 차, 친절함의 밑천이 드러났다.

친절함의 근원은 체력이다.

아내는 종종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곤 한다. 그 이유는 친절함과 배려심이다. 당연히 나도 짜증을 많이 내지만 그래도 그 빈도나 정도가 적다고 생각 해주는 것 같다.

여행을 낯설어 하고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내는 여행을 시작 한 이후로 신경이 날카로워 질 때가 있었고, 항상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내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아내는 그 점에 자주 고마움을 표현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체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혼여행을 떠나 온지 30일 차,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는 23일 차가 된 지금, 나는 얼마 전까지 체력적으로 한계를 마주한 일이 별로 없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전에 잠깐 여행을 한 파리도, 산티아고 길(프랑스길)도 이미 와 봤던 여행지였기에 낯선 상황도 많지 않았던 것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북쪽길로 오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프랑스길보다 훨씬 어려운 길에, 두 번이나 걸었던 프랑스길과는 달리 매 순간이 낯설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었다.


북쪽길을 걸은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는데, 가파른 산을 몇 번이나 넘었고, 마을에 식당이나 바가 없어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일도 많았다. 표지판이 많지 않아 길을 헤매기도 했다. 한 두 번은 재밌다고만 생각했자. 하지만 피로가 쌓이면서 나도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고 아내와 같이 짜증을 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나의 성질머리를 아내도 나도 거의 처음 본 것이다. 여행 30일 만에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은 유독 힘든 하루였다. 계속된 산행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힘도 없는 상태였다. 사소한 일들이 쌓여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몇 번이고 짜증을 내었다.

'오늘 아내랑 싸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오늘은 아내가 초인모드로 변했다. 




절반 정도 길을 걸은 시점, 이미 몇 개의 산의 넘고, 새로운 산을 오르기 전에 나는 아내에게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아내는 시간이 애매하니 그냥 가자고 했고, 나는 포기했다. 

하지만 산은 생각보다 더 가파르고 힘들었다. 걸음을 옮길 수록 이상하리 만치 허기가 졌다.

‘아까 밥을 먹고 왔어야 했는데…’ 

후회와 약간의 원망이 섞이며 짜증이 났다. 아내에게 핀잔을 주며 ‘그러게 내가 아까 밥 먹고 오지니까’ 하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내라고 산이 이렇게 높고 길 줄 알았을까, 슬슬 짜증이 날 법 한데, 짜증은 커녕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쩌지도 못 하는 상황에 나도 결국 입을 닫고 산을 계속 올랐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다리에 힘은 점점 빠졌다. 아내는 내 상태를 보고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분명 본인도 힘들텐데 불평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길을 앞서가며 진흙탕이 된 길을 알려주고,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았다. 갑자기 초인모드가 된 것이다. 


후에 아내에게 들었는데, 내가 쓰러지면 어디에 연락을 해야할지 시뮬레이션을 하며 걸었다고 했다. 

내 짜증을 다 받아주며, 엄홍길 대장에 빙의 한 듯 낯설고 힘든 길을 리드했던 아내, 나도 아내 스스로도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팔까지 걷어붙이고 초인모드로 변신한 아내.


길고 힘들었던 길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한 뒤 한 숨 돌린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처음 마주한 각자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내는 나의 성향, 기본적으로 이해심 많은 모습이 당연한 것 타고난 것이라 생각 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근본은 체력에서 나오는 마음의 여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힘들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자 한없이 까칠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 나는, 나에 대해서 오늘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웹툰이자 드라마화 되었던 미생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또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 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새삼 이 말이 떠올랐다. 경쟁이나 성장을 위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더 없이 건강해지고 체력을 키우는 것이 친절함의 기본이다.


한편 아내도 스스로의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이런 경험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낯선 상황에서 주도적이 되는 경험. 

그렇게 우리는 결심을 했다. 숙소 예약, 주문 등 낯설고 어려운 일들을 아내가 도맡아 하기로 했다. 내가 경험이 있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에서 내가 주로 했었는데, 아내가 이런 일들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내 예상보다 많은 것을 주고 있다. 특히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함께 각자의 한계를 경험하고, 옆에서 지켜주고, 함께 성장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앞으로 50일, 남은 우리의 신혼여행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어떤 일이든 우리가 서로를 더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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