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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Feb 15. 2023

정신이 늙지 않는다면야.

해 바뀌면서 시작한 수영은 순항 중에 있다. 자유형을 중점적으로 배우는 초급반을 지나 중급반 중반부에 접어들어 한창 배영 팔돌리기를 익히는 중이다. 수영을 배워 본 사람이면 알겠으나 가장 첫 번째와 가장 마지막이 가장 선호되지 않는 순번이다. 전자는 처음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 특히 새로운 동작을 구사해야 할 경우 더더욱 느낄 부담감 때문이고 후자는 아무래도 대기하는 시간이 길다보니 다소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발차기 속도가 빨라 괜히 앞 사람에게 번거로움을 줄까 염려하여 1번으로 시작한다. 자유형 속도에 비해 배영 속도가 훨씬 더뎌서 뒷 순서 사람과 계속 부딪히는 바람에 그게 나로서는 빠른 시일내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 였는데 오늘 강사분이 친절히 발차기를 일러 준 덕분에 어느 정도 더딘 속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여러모로 느릴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강사분도 더 밀착하여 알려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더딘 속도가 더더욱 눈에 띄었을 것이고.

가장 첫번째를 내가 자진해서 맡는다면(그걸 반 사람들이 반기는지는 모르겠다만 빠른 속도로 당위성을 확보하는 편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이게 좋지 않겠느냐는 내 나름의 설득 방식이다.) 가장 마지막을 자진해서 맡는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시에서 운영하는 수영장 특성 상 반 순환이 중요하여 진도 속도에 자비가 없기 때문에 어르신이 그 진도 속도에 맞추기에는 체력적으로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강사도 그에 관한 인지를 하고 할 수 있는 한 그 분을 최대한 커버하는 선에서 강습을 이어나간다. 그러다보니 큰 킥판 발차기에서 작은 킥판 발차기로 전환하여 자유형을 하는 타이밍에 그 분은 큰 킥판을 고수하여 발차기를 이행하거나 혹은 자유형을 시도하는 등의 다른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그 면은 단지 느림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나는 다름으로 여기고 있다. 수영을 익히는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이다.

자유형을 할 때는 그 분과의 간격을 어느 정도 잘 유지하고 있었으나 오늘 나의 배영 속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면서 그 분과의 간격을 잘 맞추지 못하고 몇 번 부딪히는 일이 있었다. 내 느린 배영 속도를 의식하여 자유형을 할 때보다 좀 더 빨리 출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도 그런 충돌이 있곤 해서(강습 중 간격 맞추기에 실패하여 사람들끼리 충돌하는 일은 흔하다.) 괜히 내가 그분을 조급하게 만들까 괜찮다는 말을 연거푸 이어나갔는데 오늘도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괜찮아,1등은 먼저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대답이 무언가 나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

종종 생각을 한다. 난 여전히 젊으나 이젠 어리지 않다고. 특히 신체적으로 말이다. 신체적 측면에 있어서 내게 성장할 거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라고 있다기 보다는 늙고 있다. 내가 신체적으로 향유하는 젊음에 기인한 것들은 낡아 없어질 것이 자명하다. 나는 분명히 늙고 있다. 지금도 실감하고 있는 건 꾸준히 관리하고 애쓰지 않으면 지금 체력의 현상 유지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더 나아질 체력은 없다. 그런 건 없다. 틀림없이 나는 낡고 있고 늙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체적 젊음에 기인한 혈기왕성함으로 어르신을 괜히 위협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 분의 체력 상태를 고려하여 수영반 강습 보다는 아쿠아로빅이 적절해보이며 개인 레슨을 받으시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강사쌤의 팩트풀(?)한 조언을 엿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마땅한 배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느린 게 민폐가 아니라 빠른 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젊은 사람들도 반절은 빠져나간 수영반에서 여전히 그 분은 당신의 페이스대로 열심히 운동하고 느린 속도를 스스로 문제 삼지 않으시며 설령 그 속도의 차이가 모종의 박탈감 내지는 상실의 형태로 다가올 지라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신다. 사실 시큰해하는 것은 덜 성숙한 내 몫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상실에 의연할 수 없는 미숙한,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젊은이이기 때문이다.

잘 늙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시간은 공평하고, 낡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체적 젊음을 자랑하는 건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유한한 세상의 유기체인 나 역시 별 수 있겠는가. 새빠지게 운동한다한들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늙을 수 있을까. 나의 소관이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스스로를 젊다고 여길 수 없는 그 시기가 찾아온다면, 무엇으로 내 존재를 지탱할 수 있을까.

니체의 명랑성을 떠올린다. 그의 니힐리즘은 친구 쇼펜하우어처럼 소극적이지 않았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 니힐리즘을 온몸으로 받아내었다. 혹독한 세상을 관철시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나아가고 실천하는고자 하는 정신일 것이다. 정신이 늙지 않는다면 유한한 신체가 전진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새롭고 낯선 무언가를 직면하게 되더라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소망을 잃지 않은 채로 말이다. 소망을 품는 것 자체가 어리석을 지라도.

빠르고 민첩한 젊은 시민들과 노인이 된 나의 모습이 동일하리라는 기대는 없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의 정신은 늙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한 늙지 않은 나의 정신이 신체적인 변화를 명랑하게 받아내리라 믿는다. 넉살 좋고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는 것. 느릿느릿 걸을 지라도 허리가 반듯하고 말에 유머가 많은 노인이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민감한 젊은이들을 정신 없이 웃게 만드는 것.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며칠 전 어떤 자리에서 내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께 무엇가를 가르칠 기회를 부여받은 적 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치기 밖에 없는 청년의 완벽하지 않은 말에 그 분들은 미동 없이 귀를 기울이셨다. 인내와 끈기로 끝까지 자리에 함께 하셨다. 진지한 그분들의 태도는 감동이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럴 수 있을까. 모르는 것을 알고 싶다는 그 순전한 마음만으로 나의 자식보다 한참 어린 젊은이에게 온 힘을 다해 집중할 수 있을까. 감히 그리 늙고 싶다 다짐한다. 이 또한 늙지 않은 정신으로 명랑함과 그로부터 비롯한 휴머를 장착해야 가능하리라 본다. 몸이 낡는 것은 막을 수 없다만 정신이 낡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흔히 이야기하는 성숙의 한 형태겠지.

수영장의 어르신과 나의 말에 귀 기울이던 어른들의 청량한 눈빛이 눈에 아른거린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언젠가 돌아갈 우리 모두의 집에 정신이 늙지 않은 이들이 가득하겠구나. 어린 아이들이 가득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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