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 오픈 첫날엔 첫 예약 손님들과 조촐한 치맥 파티를 하며 오픈을 자축했다. 첫날은 우리와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된 고마운 손님도 한 분 찾아오셨다. 게스트하우스를 하다 보면 주인장 못지않게 이 공간을 좋아해 주는 단골손님들이 생기는데 주인장과 좋은 관계가 생성되는 단골들은 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스텝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중한 인연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가장 큰 재미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오픈 초반에 오셨던 분들이 더욱 공간에 애정이 있는 편이고 단골손님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새로운 만남과 긴장감이 교차한 첫날의 무사히 잘 끝나고 둘째 날이 찾아왔다. (첫날부터 테라스 벽돌 기둥이 무너지고 유리창을 너무 열심히 닦았는지 참새가 창문에 부딪혀 사생을 헤매다 기운을 차리고 날아간 작은 이벤트가 있긴 했다)
둘째 날에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생겼는데 바로 우리 게스트하우스가 위치한 묵호에 드라마 촬영팀이 온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보니 묵호등대 주차장에 KBS 드라마 ‘멜로 홀릭’이라고 적힌 촬영차가 있었다. 물어보니 현재 방영 중인 프로그램은 아니고 사전제작 형태로 촬영 중인 드라마라고 했다. 낮에는 등대 쪽을 촬영하고 저녁엔 게스트하우스 인근의 골목길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오픈 둘째 날이라 그런지 신기하긴 했지만 손님 맞을 준비로 바빠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체크인 시간까지 청소하고 정리하기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날은 세명의 손님이 방문하셨고 체크인을 해드린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손님들이 카페 공간에 나와계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마침 가게 근처에서 야간 촬영을 하고 있어 손님들과 함께 구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가 자기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연예인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열정남 ‘유노윤호’ 씨와 ‘경수진’ 씨였는데 최근 MBC '나 혼자 산다' 프로그램에서 모두 매력을 뽐낸 유명한 연예인들이었다. 나 같은 경우 그동안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며 루틴 한 일상에 갇혀 살았는데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한 편의 에피소드가 참 재밌었다. 사장님이 된 것도 신기하고, 젊은 손님들과 함께 마시는 맥주 한 잔도 좋고 우리 집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는 건 더욱더 믿기지 않고 말이다. 회사 밖으로 나오니 삶이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아 사업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즐겁게 먹고 마시던 중 갑자기 PD님 한 분이 가게에 들어오셔서 사장님을 찾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주무시려나 하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나가보니 혹시 가게 앞 테라스와 골목길에서 촬영해도 될지를 물어보시는 거였다. 근처 조명과 야경이 좋아 촬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촬영 스텝과 장비가 실내로 들어와야 해서 미리 양해를 구하는 거라는 말씀과 함께 말이다. 1~2시간 정도 촬영 예정이라고 하셔서 시간도 괜찮고 손님들께서도 흔쾌히 좋다고 해주셔서 뜻하지 않게 가게 안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을 구경하며 담당 PD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유노윤호’ 씨의 일본 팬이 많으니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게스트하우스를 홍보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듣고 보니 좋은 아이디어 같아 이참에 드라마가 방영되면 현수막도 하나 만들고 인터넷에 일본어로 홍보를 해보는 건 어떨지, 이러다 가게가 대박 나는 건 아닐지 등 즐거운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국내 유일! 열정남 유노윤호가 화장실 두 번 다녀온 게스트하우스!’ 이런 말도 안 되는 홍보문구조차 상상하곤 했으니 오픈 이틀째 초보 사장님의 설렘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려나 모르겠다.
드라마는 사전 촬영 후 가을 즈음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는데 (촬영은 6월) 방영되는 채널과 시기는 조금 바뀔 수도 있다고 하셨다. 몇 시간 뒤 무사히 촬영은 끝났고 우리도 덕분에 좋은 기운을 받은 것 같아 앞으로 사업도 잘 되고 드라마도 성공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해 가을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방송 첫날이 왔고 드라마는 KBS가 아닌 OCN에서 방영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처음 드라마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갸우뚱했던 사람이라면 촉이 좋다! 낯선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결국 흥행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 많았던 ‘또 오해영’이라는 히트작 PD님이 만든 드라마였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었지만 1화를 보는 순간 느낌이 바로 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카메라에 담긴 촬영 장면이 궁금해 계속해서 드라마를 챙겨봤고 몇 화 지나자 드디어! 묵호에서 찍은 장면이 나왔다. 논골담길과 마을이 아주 예쁘게 담겼는데 가게 앞 테라스에서 찍은 장면은 배우들이 클로즈업된 화면이라 주변 배경만 조금 나오는 정도였다. 그래도 예쁜 바닷가 시골 마을이 영상에 잘 담겨 그 아쉬움을 달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묵호가 나오던 회차에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드라마가 방영되던 날 우리는 부모님 댁에 방문해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며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부모님과 어린 조카들은 삼촌네 집이 TV에 나온다며 신나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교수와 제자 간의 부적절한 불륜관계와 목욕 장면이 나와 보는 내내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안 그래도 대면 대면한 가족인데 온 가족이 함께 보기에는 누가 봐도 민망한 장면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망함에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해서 정적이 흘렀다는 비보를 들려준다. 어머니께서 나지막이 드라마에 나왔다는 건 홍보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으니 그날 어떤 장면이 펼쳐졌는지는 각자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겠다. 당시엔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인생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추가된 느낌이다.
아! 그리고 기대했던 일본인 손님은 2년간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웃어넘길 수 없는 슬픈 소식도 함께 전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슬픈 건 우리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지만 드라마는 목욕신보다 더 민망한 최고 시청률 0.5%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우리보다 몇 배는 더 가슴 아파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혹시라도 당시 촬영팀 관계자 중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몇 달간 고생하며 촬영한 스텝과 배우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할까 한다. 이렇게 오픈 둘째 날, 우리의 생애 첫 드라마 촬영과 사업 대박의 꿈은 즐거운 상상으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