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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크어버드 Sep 16. 2020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는 사람들

비 오는 조용한 밤 9시 전화벨이 울린다. 침대 위의 행복을 깨고 싶진 않지만 혹시라도 손님일까? 하는 마음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전화기를 든다. 지금 입실이 가능한지 묻는 손님의 전화였는데 쉬고 싶은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고 넓은 사장님의 마음으로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로 오신다고 해 근처에 주차 가능한 곳을 알려드린 후 바로 가게로 출발했는데 조금 가다 보니 큰 배낭에 우비를 입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한 대 보이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아! 저 손님이구나! 싶어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린 후 손님을 모시고 체크인을 해드렸다. 짐이 워낙 많아 궁금함에 여쭤보니 오토바이로 두 달간 전국 일주를 하셨다고 한다. 오늘이 두 달간의 여행 중 마지막 날이고 내일 아침엔 오토바이와 짐은 용달차로, 본인은 고속버스로 서울로 돌아가신다고 한다. 전라남도부터 시작해 제주도로 입도 후 다시 부산으로 나와 동해안 라인까지 올라오는 긴 여정이었는데, 여행의 끝이 아쉬우면서도 무사히 잘 끝난 안도감이 교차하신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퇴사 후 가장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중 오토바이 여행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타고 온 오토바이는 과거 전적(?)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이미 한국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온 오토바이였다. 몇 년 전 사촌 형이 대륙횡단을 하고 왔는데 잔고장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친 내구성 좋은 제품인 데다 안전한 여행을 소망하는 의미를 담아 출발 전 꼼꼼히 점검 후 몸을 실었다고 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전국 일주까지 하고 오다니 내 생각엔 주인보다 오토바이가 더 복 받은 것 같다.


싱글남녀에게 휴학 또는 퇴사 후의 공백기는 긴 여행을 떠나기 아주 좋은 시기이다. 인생의 전환점에 홀로 떠나는 여행의 맛은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텐데, 비록 선뜻 용기도 안 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돈 걱정에 앞서는 게 당연하겠지만 한 번쯤은 눈 꼭 감고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선에서는 무조건 추천하는 바이다.




동해항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왕복하는 국제여객선 터미널이 있는데 일 년에 꼭 한 두 분씩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손님이 오시곤 했다. 오토바이로 횡단하시는 분도 있지만, 온 가족이 버스로 함께 떠나거나 혼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맡기는 경우도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탑승 역

하루는 30대 스웨덴 청년이 숙소에 머물렀다. 일찍 체크인을 했던 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한다. 한국에서 2년 정도 생활하다 돌아가는 건데 전에 탑승했던 횡단 열차가 너무 좋았어서 올 때는 비행기를 타더라도 스웨덴으로 돌아갈 땐 앞으로도 이 열차를 탈거라고 한다. 프리랜서라 특정한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한 번씩 장기휴가를 가지곤 하는데 그 장기휴가의 주요 일정 중 하나가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인 거다. 중간중간 특별히 관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시간은 기차에서 그동안 못 본 책을 읽거나 태블릿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실컷 보며 여유 있게 쉬어 간다고 한다.


바쁜 직장생활에 힘들게 휴가를 내고, 그 아까운 시간을 놓칠 수 없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꽉 찬 여행 일정을 소유하는 한국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생소한 광경일 테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던 수많은 손님 중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와서 쉬는 법을 모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든 분들이 있었는데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빠른 한국사회의 평범한 모습 같다. 바쁘지 않거나 할 일이 없으면 왠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고, 왠지 불안감을 느끼는 분들을 참 많이 봐왔는데 언제쯤 한국 사회도 지금보다는 느린 속도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외국 못지않은 느림의 미학이 있는 지방 중소도시의 삶이 참 좋다.


손님 중엔 세계 일주를 하신 분도 있었다. 30대 남자분으로 퇴사 후 2년째 여행 중이시라고 한다. 일 년간의 여행 후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한인 민박 사장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기획 중이셨다. 본인은 천성이 워낙 돌아다녀야 하는지라 한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민박을 운영하지는 못할 것 같고 그분들의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IT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하시며 말이다. 세계 일주 여행자들이 모이는 동호회 같은 곳에서도 활동하시는 중이었는데 나도 책으로 읽어본 여행자들과도 인연이 있는 사이로 이들이 모이면 정말 다양한 인생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우리 부부도 세계 곳곳을 다니기 좋아했던 터라 오랜만에 다양한 여행지에 대한 추억을 나누곤 하니 이야기 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물론, 여행 다닐 돈을 아껴 폭등 전 서울의 아파트를 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들지만 부부가 평생 함께 공유할 추억을 만들었으니 이게 진짜 부자인 거겠지? 그렇겠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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