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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리_8-4-1_일본_교활

매우 중요한 사실

by 하얀돌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못하였다. 이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의 식민지들이 대부분 원주민에 대한 정복을 통해 이뤄졌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다.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피를 충분히 흘렸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현상의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은 두 전쟁을 통해 조선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외부세력의 배제라는 필요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 백성 전체의 항복이라는 충분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조선의 부분적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서 일본은 매우 교묘한 방식을 활용하였다. 당시까지도 존재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군대와 협조하여 의병에 대한 조직적인 진압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관군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이점을(조선 군주의 해산명령, 원활한 보급지원, 정확한 지리적 정보, 일반백성과 의병과의 분리 작업 등) 활용할 수 있었으며 기민하게 이이제이의 수법을 발휘하였다. 이후 의병활동이 살육 수준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본이 결코 조선 백성 전체와의 전면전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이후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의 지배 계급들에 대한 설득, 회유, 매수, 협박을 진행하였으며 서양세력의 침탈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교묘히 활용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비폭력적인 합방을 조작해낸 것이다. 조약서에 고종 황제의 정상적인 옥새와 서명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한일합방조약 무효 및 불법론은 또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일부 대신들을 겁박하여 조약이라는 한 장짜리의 문서 행위를 만들어 내었고, 이 또한 최종 서명이 빠져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군주의 승인이라는 이름을 팔아,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조선 백성들의 저항의지를 봉쇄해버린 비겁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전면전이 가져올 엄청난 후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함부로 이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이미 300년전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치루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던 임진왜란으로부터 일본은 교훈을 받고 있었다. 조선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일본은 정정당당한 정면승부보다는 교활한 우회적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지배 계급들을 매수하고 주요 결정을 조작하여 조선 정복이라는 전면전의 부담을 회피하였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내부의 무력저항에 대해서는 관군과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내부를 파편화하여 대처하고, 한일합방의 최종결정이 이뤄지기 이전에 미리 그 싹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피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었다. 일본이 전면전을 수행하였을 경우 조선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 혹은 장기적인 게릴라전의 진흙탕에 발이 묶여 버리게 되었을지, 그래서 이후 만주와 중국본토와 남양으로의 확전을 아예 시도해보지 못했을지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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