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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현상 1

만주족

by 하얀돌

(한민족에 맞섰던 나라와 민족 https://brunch.co.kr/@sonsson/31)


만주족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이웃 사촌이었으며 문화와 인종적으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기복이 있었지만 삼국 시대에는 나라를 구성하는 주요 집단의 하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서는 자신들이 섬기던 어버이의 나라라고도 하였다. 만주족이 처음으로 세웠던 금나라는 신라왕의 성에서부터 나왔고, 아골타는 여진과 발해가 같은 집 식구라고 했다.


누르하치의 6대조 아이신지로 먼터무는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오도리 만호부의 장이었으며, 이성계의 의형제로 여러 번 이성계를 위기에서 구했던 북청 출신 청해백 퉁두란과는 6촌 형제 사이였다.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만주의 왕으로 불리던 명나라 장수 이성량에 협력했고, 이성량은 고려의 권문귀족이었던 이천년의 6대손이었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여송의 아버지였다. 만주는 고려와 조선과 끈끈하게 연결된 만주족과 고려와 조선의 후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누루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조상의 나라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습니다"라는 제안까지 했다.


청나라는 후금 시절과 대청으로 국명을 변경하는 시절에 걸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2번의 전쟁을 일으킨다. 정묘호란 당시에는 조선의 조정이 신속하게 강화로 입도하고 적정한 선에서 양국은 타협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병자호란 시기에는 왕이 강화도로 가는 길이 일찍 막혀버리고, 남한산성에서의 40여 일 동안의 농성 끝에 인조 임금이 홍타이지에게 아홉 번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한나라의 침입 때도,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 때도, 거란의 침입 때도, 몽골이 침입 때도, 왜군의 침입 때도, 한일합방의 시기에도 없었던 우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며 유일한 순간이었다.


청나라는 왕의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조선에 대한 처우를 특별히 가혹하게 하지 않았고 혹은 하지 못했다. 청나라 군대가 저항이 격렬했던 중국의 양주라는 단 한 지역에서 80만명에 이르는 인명을 살상하는 대살육을 벌였던 것들과 비교하면 이 점은 매우 분명하다.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변발과 호복을 강요하였으며 머리카락이 싫으면 머리를 내놓으라 했고 청나라 후기로 갈수록 중국 전통 복식은 사라졌다.


이러한 풍습과 문화에 대한 강요가 조선에는 없었고, 세계의 모든 승전 이후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총독의 파견, 왕의 교체 등도 없었고, 당연히 조선을 청나라 영토로 병합하고자 하는 요구도 없었다. 왕자를 인질로 끌고 갔지만 길지 않은 시간내에 다시 돌려보냈다. 이런 모습들은 전쟁의 역사에서 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을 것. 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쓸 것. 세자,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청의 수도에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과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정기적으로 청에 사신을 파견할 것.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심양으로 송환할 것.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 매년 예물을 청에 세폐로 보낼 것." 청나라가 조선에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양국 귀족의 자제들간 혼인을 장례하고 우의를 다지자고 했으며, 조선의 땅 한 평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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