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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현상 2

천연두

by 하얀돌

(한민족에 맞섰던 나라와 민족 https://brunch.co.kr/@sonsson/31)


청나라는 병자호란 당시만 하더라도 북방의 열악한 환경과 작은 인구규모로 인해 동원할 수 있는 총병력이 4만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조선과의 전쟁을 끝내고 주변 부족들과 여러 한족을 병력으로 흡수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후대의 시기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정묘호란의 전개과정 그리고 몽골이 고려를 대상으로 벌였던 장기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과의 전쟁에서는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몽진하는 것을 차단하고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역량 전체를 대상으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여 완승을 거두는 모습을 시도하기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조선왕의 항복이라는 상징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선전하고 빨리 전쟁을 종결하려는 것이다.


최근의 일부 견해에 따르면 당시 청나라의 지배계급들에게는 천연두에 대한 합리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이 있었다. 타 지역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던 만주족은 상대적으로 천연두에 대한 내성이 매우 약한 편이었다.


천연두 자체가 이미 치사율이 30%를 넘나드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고, 청나라 건국 이후 여러 황족들도 천연두에 죽거나 그 후유증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최고 권력자였던 순치제마저 24세에 천연두로 요절하게 되고, 마마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병에 대한 면역이 확인되었다고 하여, 맏이가 아닌 작은 아들이면서도 천자이자 몽골의 대칸으로 선택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곰보 황제 강희제였다.


이러한 저간의 알려지거나 알려지지않은 사연들이 뒤섞인 속에서 남한산성의 농성으로 전쟁은 지체되고 있었고, 청군의 진영에서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왕의 항복을 고집하였던 홍타이지는 마마를 겪지 않았던 몸으로 천연두에 감염될 경우 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천연두가 퍼지기 시작하는 전장을 떠나 빨리 피병 휴양지로 옮겨갈 필요가 있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그렇게 일찍 막히지 않았고, 남한산성의 군량미가 그렇게 부족하지 않았고, 마마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만주 지배세력의 사정을 알기만 했더라면, 청나라 군대는 인조의 항복의식을 받아 내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조선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삼전도의 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 여러 예상하지 못한 사태와 불확실성의 누적이 복합적으로 쌓인 결과가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청나라는 오랜 기간 좋았다 나빴다 티격태격 하기는 했지만, 어버이의 나라로 형제의 나라로, 자신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조선에 대해, 자신의 핏줄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나라에 대해, 치명적인 압박과 비참한 대우를 강요하기 싫었거나 혹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조선 민족 전체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달성하기도 쉽지 않았고, 인종적 문화적 역사적 친연성까지를 고려했을 때, 청나라는 어떻게 보면 부드럽다고 표현해야 할 수준에서 조선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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