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22일. 17세의 구본웅(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은 탕! 탕! 탕! 연이은 총소리에 놀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총소리는 효제동 지붕 위를 달려가는 한 사내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내 역시도 일본 경찰들을 향하여 양손에 두 자루의 총을 쏘고 있습니다.
천여 명의 기마대와 무장 경관은 사중 포위망을 겹겹이 형성하여 그 사내를 옥죄어갑니다.
소년은 쌍권총 사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용기에 강인함과 인간의 고귀한 투쟁심을 보았습니다.
두려움과 혼란, 경외와 동경의 마음이 일었습니다. 분노와 증오도 느껴졌습니다.
열흘 전인 1월 12일 밤. 귀를 찢는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습니다.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이자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처인 종로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습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의열단원인 김상옥 의사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의 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1월 17일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습니다.
은신처가 탄로되자 쌍권총을 잡은 김상옥 의사는 그를 잡으러 온 20여 명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비롯해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포위망을 탈출합니다.
김상옥 의사는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안장사 방향으로 발자국이 향하도록 짚신을 거꾸로 신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1월 19일 새벽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시절의 동료인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습니다.
그러나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습니다.
상하이로부터 효제동에 온 서신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 끝에 은신처를 실토했던 것입니다.
일본 경찰은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천여 명의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이혜수의 집을 첩첩이 포위하였습니다.
마침내 일본 경찰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듯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을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천여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권총 두 자루에 의지해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일본 경관과 총격전을 벌여 일본 군경 15~16명을 쓰러뜨렸습니다.
하지만, 탄환은 금세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한 발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며 생각합니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내 마지막 행동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손이 남기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하나의 불꽃이다.
내 목숨이 끊어지는 이 순간이 누군가에게 용기가 된다면, 나는 이 삶을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다." 깊은 비애가 느껴지는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죽음이었습니다.
나중에 김상옥 의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입니다.
김상옥 의사(1889년 3월 4일 ~ 1923년 1월 22일)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으로, 의열투쟁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독립운동의 불꽃과도 같았습니다.
* 1913년에는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였습니다.
* 1919년 3.1 운동 참여 후 독립운동가로 활동 시작하였습니다.
* 1920년 미국 의원단 방한을 계기로 조선 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의 주살과 적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시켜 갔습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인 8월 23일, 한훈과 김동순 등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게 됩니다.
*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후 피신, 1월 22일 일본 경찰과의 교전 중 순국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구본웅은 1930년대 개성적인 표현 세계를 개척한 한국 야수파 화가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야수파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등장한 전위적 경향의 하나로, 거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이 특징인 미술 사조입니다.
대표적인 야수파 화가로는 마티스가 있습니다. 구본웅 작가를 대표하는 여러 작품들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친구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이 있습니다.
형상을 비교적 거친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 눈에 띄는 색채대비가 잘 느껴지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을 빼고 우리 문학사를 논할 수가 없듯이 구본웅을 빼고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말하기가 힘듭니다.
서울에서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난 구본웅은 불행히도 2살 때 가정부의 실수로 댓돌 위에 떨어져 평생 척추질환자가 됐습니다. 꼽추가 된 거죠.
한국 최초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은 그리 대중적인 화가는 아니지만, 탁월했습니다. 자신의 타고난 슬픔과 애환을 그림에 쏟아부었습니다.
1952년, 구본웅이 죽고서 그림 한 장이 펼쳐졌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친구의 초상>입니다. 그림을 본 구본웅의 아버지는 ‘해경이네’라고 신음하듯 외쳤다고 합니다. 김해경은 이상의 본명입니다.
김상옥 의사의 포위 광경을 당시 17살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목격했다고 합니다.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저항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과 글로 남겼을 정도로 감격했지만, 이후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