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5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할아버지는 매국노, 손자는 독립운동가



1944년 11월 중국 절강성 의오현, 깊은 가을의 정취와 초겨울의 싸늘한 기운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밤공기는 맑고 차가우며, 들판과 산, 강이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고요히 숨 쉬고 있습니다.

마을은 조용하고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흙벽과 기와지붕으로 이루어진 가옥들은 달빛 아래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추수기를 끝낸 들판은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으며, 서리가 내려 빛나는 곡식단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습니다. 바람이 논밭을 지나며 마른 이삭들을 흔듭니다.

의오현을 가로지르는 강물은 차갑고 맑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밤의 적막 속에서 강물은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소리를 냅니다. 

강가에 서린 안개는 달빛과 별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며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강 근처의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물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주변의 나무와 풀들은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산과 숲은 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자라는 나무들은 차가운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며 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그 사이로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립니다.

차갑고 정적인 풍경 속에서 의오현의 밤은 묵직하고도 고요합니다.



어둠을 틈타 산길과 숲속으로 몸을 숨기며 탈영병 다섯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박승유(1924~1990년), 김권, 신의철, 이희화, 김영관 이들 다섯은 일본군 제6군 소속 요코이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조선인 출신 병사들이었습니다.

달빛조차 흐릿하게 비추는 어두운 숲에서 그들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결연한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보게들.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끝이야. 이 산 너머 마을에 닿으면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박승유는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에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들은 군복에서 일본군임을 나타내는 모든 흔적을 제거했으며, 찢어진 천과 흙으로 얼굴을 가리며 정체를 숨겼습니다. 허겁지겁 챙겨온 소량의 식량과 소총 몇 자루가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습니다.



박승유는 1944년 경성법학 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고등고시 응시는 거부했습니다. 일제에 부역하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 박부양은 일본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를 권유했습니다. 할아버지 박제순은 을사 5적이자 경술 국적이었고, 안성 군수였던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조국을 등지고 얻은 권력과 재산은 가족에게 부유함을 남겼습니다. 그 점이 박승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친일에 죄책감을 느껴 독립운동가로 전향을 결심하고 탈영을 시도했습니다.

"자네들 혹시 안준생의 소식에 대해 들어봤는가? 안중근 장군의 차남 안준생이. 그 호부견자(虎父犬子, 아비는 범인데 새끼는 개라는 뜻으로 훌륭한 아버지에 비하여 자식은 그렇지 못함을 이르는 말) 말일쎄." 김영관이 말했습니다. 

김영관은 진즉부터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는데,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시인 1944년에 일본 제국 육군의 징병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징병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라고 했던 그 호래자식말이지?" 

이희화가 멸시 어린 태도로 강하게 내뱉었습니다.

"그 사죄가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게 벌써 5년 전이었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짓밟는 행동이었지.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한 거나 다름없어." 이번에는 신희철이 압도적인 혐오감에 사로잡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선대의 죄 때문에 자괴감을 느꼈던 박승유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군견의 짖는 소리와 숲을 비추는 일본군의 손전등 불빛에 이들은 숨을 죽이며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움직임을 최소화했습니다.

어두운 숲속에서 서로의 목숨을 건 숨 막히는 추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투쟁을 하는 이들과 이를 억누르려는 자들의 치열한 대립이 밤의 정적 속에서 팽팽히 맞서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 지구 등 적 부대 중에 우리 동포 사병이 다수 배치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초모(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을 모집함) 공작에 주력하였습니다. 

평소 음악에 소질이 있던 박승유는 염전(厭戰, 전쟁을 싫어함) 가요와 투항 권고 방송 등을 통한 대적 심리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시절 그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고 자책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박 씨성을 거부하고 가명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박승유는 8.15 광복 후 조선오페라 협회 간사로 일하면서 성악가로 활동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자원입대해 국방부 정훈부 합창단원으로서 전국의 야전 부대를 순회하며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파의 후손인 박승유에게 광복군의 공훈을 인정하여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습니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안중근의 아들인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 후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바로 죽여야 할 대상이라 말했습니다.

안준생은 결국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1946년 간신히 귀국하여 남한에서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다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견부호자(犬父虎子)와 호부견자(虎父犬子)의 인생들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대 1000, 열흘의 격전, 경성피스톨 김상옥 의사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