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2월 1일 겨울 끝자락, 차가운 바람이 경주 녹동의 기와지붕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잿빛 하늘 아래, 한 양반가의 대청마루에는 흰 천이 드리워졌고, 마당 한쪽에는 향불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깊은 애도의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마당에는 새하얀 상복을 갖춰 입은 친족들과 문상객들이 모여 있었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둥에 몸을 기대 흐느끼는 여인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사내들, 입을 굳게 다문 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노인의 모습까지, 모두가 비통함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대청 위에는 어머님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정 속 그녀는 단정한 한복 차림으로,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했습니다. 그 앞에는 제상이 차려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타들어 갈 듯한 향불이 연신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술잔이 올려진 제사상에는 수의가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죽은 이를 위한 곡식과 나물, 생선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했습니다. 거센 겨울바람을 가르며 한 사내가 말을 타고 상가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백마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구름 속에서 내려온 신선 같았습니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돌아온 상주.
그의 눈빛은 차가웠으나, 그 안에는 깊은 비애가 서려 있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그의 옷자락은 겨울바람에 흩날렸고,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흩어지며 반짝였습니다. 마당 앞에서 백마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박상진은 말에서 천천히 내려와 하얀 옷자락을 정리하고, 말없이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의 신발이 마당의 흙을 밟을 때마다, 마치 세상이 고요해지는 듯했습니다.
빈소 앞에 선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절을 올렸습니다. 이마가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아무도 감히 그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향불의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박상진은 조용히 술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떨림 없는 손으로 그것을 땅에 부었습니다.
"어머니, 불효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결연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문상객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고, 박상진의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무는 이도 있었습니다.
상갓집 안에는 곡소리가 가득했지만, 그 소리는 곧 낯선 발소리에 묻혔습니다. 어둠 속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땅을 짓눌렀고, 검은 옷을 입은 일본 경찰들이 사방을 포위했습니다. 그들은 장총을 거머쥔 채, 맹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박상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일본 경찰 대장이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박상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일본 경찰들을 노려보았습니다.
"내 이미 어머니를 여윈 죄인이거늘, 어찌하여 또 포박하려 하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순간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박상진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내 스스로 가겠다." 그가 말하자, 일본 경찰들은 움찔했습니다. 조선의 혁명가가 아닌, 마치 신성한 존재를 마주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경찰들은 그의 양팔을 잡으려 했습니다. 박상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백마의 고삐를 쥐었습니다.
"물러서라."
그 단호한 외침에 순간 상가 안은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포박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박상진은 마치 장엄한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백마에 올랐습니다. 백마는 콧김을 내뿜으며 발굽을 들었고, 주위의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가 백마를 타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뒤를 검은 옷을 입은 일본 경찰들이 따라갔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백학을 까마귀 떼가 쫓아가는 형상과 같았습니다.
박상진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흰 두루마기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면서도, 그는 흔들림 없이 나아갔습니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은 1918년 2월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 교수대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순국하기 전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과 녹수가 비웃는구나”라는 절명시(絶命詩, 세상을 떠날 때 읊는 단형시)를 남겼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상진 의사는 김좌진, 홍범도, 김원봉, 박용만, 김홍일, 지청천, 이범석, 양세봉 등과 함께 무장 독립투쟁의 대표적 인물 중 1명으로 꼽힙니다.
1884년 12월 7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농소면 지당리(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지당마을)에서 아버지 간운(磵雲) 박시규(朴時奎)와 어머니 여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습니다.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의 선봉대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는 등 정미의병으로도 활약하다가 결국 체포되어서 서대문형무소 사형 제1호가 되었으며 그 유해를 박상진이 거뒀습니다.
신학문을 배우라는 허위의 권유로 박상진은 1906년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법률학 및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신돌석(申乭石)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거부하고 부임치 않았습니다. 1910년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을 보고 일제 치하에서의 판사 부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12년 대구에 김덕기(金德基), 전주의 오혁태(吳赫泰)와 함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박상진과 김덕기, 오혁태 세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음)를 설립해 곡물상을 가장하여 독립투사들의 연락처로 삼고 군자금 마련에 주력하였습니다.
1914년 부진한 대구 포목상을 정리하고, 허위의 아들인 허학 등 일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가입하였습니다.
1915년 1월 유림들을 규합해 대구 비슬산에 있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으며 7월에는 1913년에 이미 조직되었던 '풍기광복단'의 채기중(蔡基中)과 합작하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으로 활약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 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일제 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개 항목을 시달하였습니다.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이진룡)가 선임되었다가 그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남도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 경성, 삼척, 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습니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하여 주진수, 손일민, 우재룡 등은 북만주 길림 지방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 또는 신흥무관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습니다.
1915년 12월 경주 세금마차 탈취사건, 1916년 10월 동양금광회사의 마차 습격사건 등을 실행합니다.
1916년 전라남도 벌교 부호 서도현, 1917년 11월 경상북도 칠곡 부호 장승원(張承遠), 1918년 1월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등 요구한 의연금을 내지 않는 친일 지주나 관리들을 처단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는 박용하를 처단한 장두환이 체포됨에 따라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고 박상진은 안동에서 국외로 탈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 녹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가 1918년 2월 일제에 체포되었습니다. 한편 만주로 망명한 부사령 김좌진이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경상도의 최고 부자 장승원은 박상진의 스승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자금 요청을 받았으나, 군자금 대신 밀고를 합니다. 박상진마저 밀고하려 했으나 역으로 처단됩니다.
장승원의 아들이 장택상이었습니다. 박상진이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막은 자가 장택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상진 의사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고된 시기였던 1910년대 무장 독립운동에서 활약했지만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일무장 독립운동이 본격화된 건 1919년 3.1운동 이후입니다.
일제는 1910년대 무단통치를 합니다. 헌병경찰이 태형령(일본헌병이 조선인을 몽둥이로 때릴 수 있는)을 실시합니다. 교사나 공무원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찹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결사는 단체나 조직을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비밀결사 단체입니다. 1910년대 대표적인 비밀결사 단체가 대한광복회입니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기였기에 무장 독립운동사 중에 가장 고된 시기였습니다. 특히 국내에서 벌였던 무장 독립운동이라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그의 묘소도 국립현충원이 아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에 있으며 외아들을 비롯한 가족들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박상진의 부인이 경주 최씨부자 가문의 최영백이었습니다. 1961년 부산일보는 81세의 부인 최 씨 여사는 냉방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독립유공자가 포상받을 때 1등급은 대한민국장, 2등급은 대통령장, 3등급은 독립장, 4등급은 애국장, 5등급 애족장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1910년대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셨는데 독립장에 추서 받았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대한민국장 추서 대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