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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ul 14. 2020

내가 만난 치한4-만원 버스 안의 더벅머리 남자

이 남자는 왜 이러고 살까?

이 글을 시작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다 보니 문득 의문이 생긴다. 나는 왜 이리도 많은 치한을 만났을까? 당시 여자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으며 나이를 먹어갔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남편과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세상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믿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내가 유달리 치한을 많이 만났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치한들은 여자들에게만 문제를 일으키므로 일반적인 남자들은 상상조차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던 내가 바라는 것은 세상이 바뀌어서 지금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나이대의 여성들이 치한을 모르고 살면 좋겠다는 것이다.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찝찝하고 질 나쁜 치한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등하교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학교 사물함이 크지 않았고, 짐 정리를 못하는 편이라 늘 가방이 두툼하니 무거웠다. 당시에는 소매치기를 조심하지 않는 이상 굳이 가방을 앞으로 메지 않았다.


토요일이었는지, 시험 기간이었는지 확실치 않은 한낮에 하교 중이었다. 그날도 가방이 두툼하니 무거웠고, 소매치기를 조심하기 위해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었다. 버스는 사람으로 가득 차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겨울이라 두꺼운 치마 교복을 입고 한 손으로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 틈새로 가끔 보이는 풍경을 보며 내려야 할 정류장인지 아닌지 확인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한 10초가 지났을까,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나의 성기 쪽(정확히는 클리토리스)에 이상한 느낌이 있음을 알았다. 가방을 피해 어렵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웬 투박한 손이 규칙적으로 1초에 1번 정도 씩 가볍게 톡, 톡 교복 치마 위를 건드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거나 당황하면 판단을 거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세게 탁 쳤다. 손은 잽싸게 나의 등 뒤로 사라졌다. 뒤를 획 돌아보며 손 주인을 찾아보았다. 어떤 더벅머리 퉁퉁한 남자가 내 바로 뒷사람의 뒤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시 성인 남자들은 하지 않는 덥수룩한 더벅머리를 해서 머리카락에 눈이 덮일 듯 말 듯했다. 너무 화가 나서 째려보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그 사람에게 쏘아붙였다.


"뭐 하시는 거예욧!"


마침 버스는 정류장에 서서 문을 열었고, 내려야 할 곳이라 사람들을 비집고 황급히 내렸다. 집 쪽으로 다급히 몇 발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6 걸음 정도 뒤에 더벅머리 남자가 나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일단 잠시 째려보았다. 더벅머리가 멈춰 섰다. 다시 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오로지 그가 따라오지 않기를, 엄마나 아빠를 마주치기를 바라면서.


자동차 도로 쪽 인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큰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흘낏 쳐다보니 더벅머리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갔는지 몰랐다. 집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더벅머리는 두꺼운 겨울 교복 치마를 입은 여학생의 성기 위치를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 파악할 수 있었을까? 같은 여학생이라도 그렇게 못하지 싶은데 더벅머리는 정확히 가운데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이후 더벅머리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치한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기분 나쁜 치한이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더벅머리 이야기를 하자 자신들도 가끔 만원 버스에서 몸을 만지는 나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며 옷핀을 손에 들고 버스를 타야겠다고 했다. 몸에 손을 대면, 그 손을 핀으로 세게 찌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남자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냐와 그래도 옷핀으로 찔러야 한다는 얘기로 제법 오래 토론을 했다.



90년대에는 치한이 발뺌하며 오히려 피해당한 여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무고로 몰았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왔다. 요즘은 주변 사람들이 치한 잡는 것을 도와주거나 증인이 되어 준다. 세상은 확실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그 속도가 더디지만 그래도 변하고 있다.


여자도 남자도 안전함을 느끼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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