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묵은 사랑
세월에 무디어져 기념일은 무심코 지나치게 됩니다. 뜻밖에 이번 화이트데이는 특별한 의미가 담겼습니다.
본래, 화이트데이는 일본에서 유래한 상업적 기념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언제부턴가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등 기념일이 대중화되면서 그냥 넘어가려면 서운한 날도 있었습니다. 남편한테 주기보다는 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뜬금없이, 전날 모임이 있어 남편이 잠든 시간에 집에 들어왔더니, 식탁 위에 포장된 물건이 있어, ‘어디서 택배가 왔지? 주문한 것도 없는데’ 하고 포장을 열어봤더니, 하얀 초콜릿이었습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40년 세월을 지나고 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결혼기념일에도 인색했던 남편이, 화이트데이를 기억하고, 하얀 초콜릿을 선물한다는 것은 큰 사건입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하고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지 않던 사람이 화려하게 포장된 백화점 초콜릿이 아닌, 텃밭 갔다 오늘 길에 동네 마트에 들러서 하얀 초콜릿을 고르고, 포장하기까지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서로는 우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거주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알콩달콩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미지근한 묵은 사랑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우리가 되기까지는 희로애락이 숙성된 오랜 시간이 쌓여, 그 안에 담긴 서사를 연기하듯 멋쩍게 준비한 하얀 초콜릿을 맛보게 되는 과정인 것 습니다.
왜? 결혼기념일이나 화이트데이 같은 날 남편한테 받으려고만 했을까요? 내가 선물을 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인생은 늘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처음인 낯선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엎어지고, 넘어지고 하는 동안 가파른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이제야 시야가 넓혀지듯 주는 마음도 받는 마음도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우리가 되어 그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남편은 무의미한 하루에 화이트데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더한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왜 이리도 찡한지요.
그 마음을 고요히 담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