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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장규일 Apr 16. 2022

장발 남자로 살아가기(4)

장발 일기 #004

그리고 아직 장발의 여름을 겪어보지 못한 터라 당장 몇 달 후에 있을 여름에 분노에 찬 가위질과 함께 장발 일기를 마무리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들긴 한다. 지난겨울 찬 바람을 막아주는 긴 머리털의 존재를 처음 느낀 것처럼, 여름의 폭염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줄 머릿결도 이번에 제대로 한 번 느껴볼 생각이다. (글을 적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덥다...) (장발일기 #003 편에 이어)




앞 선 몇 편의 일기에서 장발을 시작하게 된 대략적인 이야기와 장단점 등을 이야기하고 나면 크게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나도 이래저래 쓸 말들이 떠올라 슬쩍슬쩍 메모를 남기며 다음 글을 준비해보고 있다.


오늘은 자식의 도리, 즉 효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대체 이게 뭐니?


최근에 어머님께서 당신의 어여쁜 손녀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신 적이 있었다. 할머니 대신 '할미'라는 짧은 단어로 당신을 부르는 손녀를 보자마자 한껏 피어나는 행복한 미소와 반대로,  그 옆에서 장발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아들내미의 모습은 아무리 손녀의 얼굴을 보며 참으려 해도 참으실 수 없었나 보다.

 

아직 이 사진 보단 짧다...

"너는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니? 대체 이 머리가 뭐니... 으잉?!"으로 시작된 어머님의 잔소리. 그 잔소리를 들으며 나는 반감보다는 오래간만이란 느낌을 더 크게 받았다. 뭔가 불편하지만 꽤나 귀에 익숙한 그런 알 수 없는 느낌이랄까? 


나이별 잔소리


 80년대생 내 나이 또래 한국의 자식(!? 욕 아님)들은 학창 시절부터 나이 든 성년에 이를 때까지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잔소리 늪에서 어지간하면 빠져나갈 수 없다. 당신이 (이제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조차 아득해진) 그 전설의 '엄친아'가 아닌 이상, 질풍노도의 시기부터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누군가는 당신을 위한 맞춤 잔소리를 준비하고 있음을 줄곧 알게 된다.

이런 메뉴판과 모바일 뱅킹이 있었더라면...

학창 시절 '공부'에 대한 잔소리는 이제 기억에서 조차 희미해졌지만, 수능 시절 어떤 대학에 갈 것인지(혹은 갔는지), 이후 취업은 했는지(했다면 어떤 회사에 갔는지), 연예는 하고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아이는 언제 가질 건지 등 사람들마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입는 내상의 크기는 비슷한,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며 선의로 해석되기 바빴던 그 불쾌하고 답답했던 잔소리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눈앞에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잔소리를 하나 둘 격파해나갔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직 회사를 (잘리지 않고) 다니고 있고, (천사 같은) 아내를 만나 (구원받고) 결혼하고, 그런 아내를 닮은 딸아이까지 얻었으니 나는 언제부턴가 이런 잔소리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도 나이를 먹고 어머님의 잔소리가 없는 삶을 살다 보니 마치 소금, 후추가 빠진 요리를 계속해서 먹는 느낌이 들더라. 마치 건강을 위해 억지로 먹는 저염식을 먹는 느낌이랄까? 가끔은 자극적이고 기름진, 먹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그런 중독적인 맛을 느끼고 싶긴 하다. 그런데 나의 장발에서 다시 그 불꽃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머님의 불타는 눈빛과 격정적인 톤, 동일한 이야기를 재탕 삼탕 하며 나를 몰아붙이는 바로 그 잔소리의 불씨 말이다.


두 가지 감정과 표정을 가진 아수라 백작처럼, 어머님은 손녀와 이야기할 땐 세상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다독이시다가도 내가 눈앞에 띄면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잔소리를 퍼부으셨다. 정확한 워딩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다.

손녀와 나를 대할 때 확연히 차이가 나시는...

"너는 나이도 있는 애가 머리가 이게 뭐니?"

"며느리가 참 사람도 좋네. 잘도 이런 남편 데리고 사는구나."

"머리는 꼭 묶고 다녀라, 절대 푸르고 다니지 마라. 보기 싫다."

"이제 곧 딸이랑 서로 머리 묶어 주고 다니겠네." 

"언제까지 기를 거니? 곱슬머리인 네가 왜 펌을 했니?"


활기를 불러일으키다.


 더 이상 당신의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다소 심심해하시던 어머님에게 아들의 장발은 사라졌던 잔소리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정도로 놀라우셨던 모양이다. 글을 적으면서 생각해보니 평생 단발을 지향하셨던 당신보다 아들의 머리가 길었으니 적잖이 놀라시긴 했을 거 같다. ㅎㅎ

나의 영광의 시절은 언제인가?


젊은 시절 자식 잘돼라 끊임없이 잔소리하시던 부모님이 어느 순간 힘을 잃고(?) 조용해지셨다면 머리를 한 번 길러보시라. (혹 평생 기르셨다면 반대로 짧게 잘라보시라.) 당신을 보는 부모님의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지고 다시금 부모님의 화려한 잔소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장발 덕분에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쭈욱 어머님의 활력 넘치는 잔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님의 삶에 하나의 재미 요소를 선사해준 나의 이 장발 선언은 어쩌면 새로운 효도의 형태인지도 모르겠다.


#장발남자로살아가기 #남자머리 #장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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