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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Sep 22. 2020

나의 멘토

무한 긍정을 심어준 고마운 오빠.

한창 사춘기였을 오빠에게 장애를 가진 연년생 동생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국사회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점은 보통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수군거림을 받곤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의 오빠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아서 늘 고마웠다. 학창 시절, 오빠와 함께 지하철 기다리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우리 남매 앞에 시각장애인이 지나갔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오빠 저 분 눈이 안 좋은가봐 안 보여서 많이 불편하겠다' 라고 했을 때 오빠는 '사람 함부로 판단하지마. 불쌍하게 보는 건 안 좋아' 라고 말을 한 적 있다. 어렸던 오빠한테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참 놀라웠다.

비록 우리가 한창 사춘기를 겪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티 안 나게 늘 내 소식에 귀 기울이고 신경 써준 오빠였다. 내가 바라본 오빠는 간디 같은 평화주의자의 모습이었다.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 나에 대해 수군거리면 오빠는 그런 사람들은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주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선생님의 역할도 같이하던 오빠였기에 긍정적인 말들을 새기며 자라온 나는 조금 안 들린다고 위축된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남들보다 조금 안 들리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굳이 위축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마음이 어릴 적부터 자라왔던 것 같다.

모든 형제자매가 그렇듯, 성인이 된 이후 각자의 삶이 바빠 서로의 삶에 신경 쓰지 못하던 우리였다. 어떨 때는 부모님을 통해 서로 간의 소식을 듣기도 하고, 가족 단톡 방에 있어도 별 대화는 없는 무뚝뚝한 남매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도, 오빠도 알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남매보다는 조금 특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고, 청각장애로 인해 많이 들을 수 없고 교육적인 제약이 있던 나에게 모든 것들을 침착하게 설명해주던 오빠를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꼭 말하고 싶다. 오빠가 결혼하기 전, 엄마와 단 둘이 맥주를 마시며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무뚝뚝한 집안이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엄마는 내게 오빠한테 잘했으면 한다는 말을 하셨다. 후천적으로 청력을 잃게 되었을 때, 재활을 위해 병원을 자주 가야 했던 나로 인해 오빠는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고 한다. 다른 엄마들이 유치원 등 하원을 도와줄 때 엄마는 오빠 목에 집 전화번호 적힌 열쇠 목걸이를 걸어주는 게 최선이었다고 한다.

 


지금 오빠는 호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릴 적 나로 인해 오빠도 무언가의 결핍이 있었을 수도 있고 하고 싶지만 참고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자라줘서 감사하고 존경한다. 이제 멀지만 자유로운 그곳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오빠를 마음 건강하게 자란 동생이 응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우리 오빠. 내가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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