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과의 만남
어제는 꿈에 대학원 논문 지도 교수님이 등장하셨다. 그분의 무슨 회갑연 비스무리 한 행사가 열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분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분은 먼발치에 앉아 계셨다. 그분의 자녀로 추정되는 분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누군가의 부재, 누군가의 공백,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가버린 자들에 대한 이야기 뭐 그런 것들이었다. 꿈에서는 꿈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에서 깨면,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오랜만에.’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꿈을 꾸고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그분은 작년 9월 초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자주 뵙는 분도 아니고, 자주 연락을 드리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에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주셨고, 나는 그분의 연구실에 가면 꼭 딥 퍼플의 “April”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분은 수백 장에 달하는 LP, 수백 장에 달하는 CD를 가지고 계셨다. 처음 그분을 뵈었을 때 연구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기다란 탁자 위엔 여러 도서들과 자료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언제나 골초 여셨던 그분의 재떨이에는 가득한 담배꽁초가 있었다. 나와 함께 논문 지도받는 친구는 언제나 그분의 연구실을 들어갈 때 호흡을 가다듬으며 들어가곤 했다. 나는 그것보다 교수님의 컬렉션 LP, CD를 살펴보느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논문 지도를 마치고,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에 찾아간 교수님의 연구실은 완전 다른 방이 되어 있었다. 긴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없는 깔끔한 테이블이 되었고, 교수님은 담배를 끊으셨다 하셨다. 퀴퀴한 찌든 담배 냄새는 더 이상 맡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교수님의 LP, CD 컬렉션에 관심이 갈 뿐이었다. 이렇게 음악 취향이 다양하신 분이라니. 하며 갈 때마다 감탄하였다. 그리고 교수님은 우리들이 왔다며 아주아주 맛있는 김치찌개 집이 있다고 거기를 데리고 가셨다. 정말 맛있긴 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렀다.
나는 박사 유학 갈림길에 혼자 고민하던 중 슬쩍 교수님 연구실에 놀러 갔다. 교수님은 나의 의도를 간파하셨는지, 베를린 자유 대학을 뜬금없이 가라 하셨다. 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머릿속에 ‘베를린 자유 대학’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다.
나는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결국 유학은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직장생활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일단 생계가 중요하고, 가정이 분리된다는 건 더욱더 힘들 수 있는 일이므로. 그리고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아직도 공부를 계속하라고 자극을 주셨다. 언제까지 소논문을 써서 내라, 너의 논문을 이제 좀 더 보완해서 2차적 결과물을 내어보자 등. 하지만, 이미 나는 공부에 손 떼기로 한 시점이라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소논문을 써볼 생각도 안 했고, 지긋지긋한 나의 석사 논문을 다시 들여다봐서 추후 연구 결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렀다.
그러다 뜬금없이 교수님이 연락을 주시면 난 곧 찾아뵙겠다고 답하고 또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몇 해가 또 흐른 후, 교수님께 이번엔 진짜 한번 뵙자고 하였다. 교수님도 매우 좋다 하시며 지금 뉴욕에 있으니 한국 가면 날짜를 잡자고 하셨다. 그리고 한국에 오셨다. 그리고 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리고 2주일도 안돼서 부고 소식을 접했다. 그의 장성한 자녀분들은 정말 급작스러운 일이라며 매우 슬퍼하셨다.
그 분과 나는 매우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 여겼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우리는 때론 크나큰 착각과 익숙함에 빠져서 뭐든지 제자리에 항상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는 않다. ‘있을 때 잘해’라는 상투적인 말은 늘 죄책감과 고립감, 상실감을 동반하는 문구이다. 또한, 모두에게 있을 때 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제나 모든 부재에는 크고 작든 일말의 아쉬움이 남겨지는 법이다.
내가 언젠가 그 교수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결국 난 그 말을 전하진 못 했다.
“교수님 성함은 중학교 입학 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성함과 같아요.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요”
난 늘 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고, 가정사를 담대하게 풀어낼 재주가 없었기에 그저 마음속에 묵혀두고 있었던 말을 영영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더 친분이 쌓이면 툴툴 털어놓듯이 꼭 말씀드리리라 라고 가슴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두고 있었던 그 말 말이다.
그분은 내가 좋아했던, 또한 그분도 좋아했던 데이비드 보위처럼 ‘space oddity’의 ‘starman’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