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감상 19화

세계의 주인

-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친구

by 호퍼

새로 산 감색 싱글코트를 입고, 검은색 더비슈즈에 로마의 고귀한 색, 자주색 양말을 신었다. 오래도록 지닌 샤넬 에고이스트로 향을 가미하고, 다나카상의 검은색 뿔테 안경으로 지적 풍미를 더했다. 날이 좋은 가을날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열차를 탔다. 오랜만에 나름 멋을 부리느라 영화시간을 놓치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먹을 볶음밥을 만드느라 늦었는지도 모른다. 계란 후라이는 꼭 올려 먹으라며 잠든 귀에 주절이고 집을 나섰다. 전전 여친이 선물한 다나카상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고맙다. 여전히 잘 타고 있다.’


‘화양연화’를 보려고 했건만, 이미 화양연화 OST가 닫힌 상영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세계의 주인]을 예매했다. 배가 고파 솥밥집에서 스테이크 솥밥을 시켰다. 배를 채우고 공원벤치에 앉아 가을 햇볕을 쬐었다. 벤치에 녹아들 듯 따뜻했다.


영화는 무척이나 좋았다. 밝고 명랑한 여고생 ‘이주인’. 소녀는 무척이나 쾌활하다. 집에서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을 딸아이가 생각났다. 주인이는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형제이고, 누군가의 친구인 주변의 모든 소녀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인 듯하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영화인 줄은 몰랐다. 주인이는 성폭력 피해자이다. 영화는 피해자 주인이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주인이는 어느 날 학교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참지 못해 친구와 싸우게 되고, 스스로 성폭력 피해자임을 공개하게 된다.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괜찮질 않다. 그 불편한 시각 안에서 주인이는 더욱 피해자 실체인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병원에서 한 아이가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 옆에 앉은 주인이는 안 아프냐고 묻는다. 아이는 안 아프다고 말한다. 정말 안 아프냐고 다시 묻는다. 아이는 귀찮은 듯 다시 안 아프다고 말한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 주인이는 그런 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아이가 되는 법. 그걸 몰랐던 주인이는 그런 상처를 내내 안 아픈 척 덮어두었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다.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들, 그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 그리고 피해자들의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아주 잘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꼭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한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 피해자이거나 피해자의 가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도 다가올 불행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세계의 주인‘은 우리의 딸이기도, 형제이기도, 친구일수도 있으니..


덧붙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1년 상담통계에서는 전체 성폭력 상담 건수 중 친족에 의한 성폭력 상담의 비중이 14.2%인 것으로 집계 되었다고 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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