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감정, 심리, 무의식 탐험형에게 추천하는 영화
- 심리적 여정과 내면 통합
- 영상미가 매우 아름다움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The Fall, 2006)
- 감정의 상징화, 상상과 현실의 경계, 어린아이와 상처 입은 남자의 이야기
장소: 감정 도자기 공방, 노스페라투의 달빛 아래
시간: 500살 흡혈귀 릴리시카가 감정을 굽는 밤, 성수의 기운이 서서히 차오를 무렵
릴리시카: (조용히 창가에 앉아 있는 성수 주전자에 찻잎을 붓는다)
"구름아, 나 그 영화 다시 봤어. 더 폴.
그 아이는 환상을 통해 남자의 절망을 구원했는데…
나는 왜 내 환상에 나를 가두었을까."
구름이: (마법 도자기 옆에 앉아 어깨를 움찔하며)
"주인님… 그건 환상이 아니라,
주인님이 자신을 감싸기 위해 만든 상징의 갑옷이에요.
그 아이, 알렉산드리아는… 그 갑옷 사이로 들어온 햇살 같은 존재였죠."
릴리시카: (찻잔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을 감는다)
"그 아이는 진심을 모른 채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지막엔 울면서 ‘그만 죽이세요’라고 말했지.
이야기의 결말을 바꿔달라고… 나도 그런 아이가 있었을까, 내 안에."
구름이: "있었죠. 주인님의 감정 도자기 중
‘잊혀진 슬픔’ 항아리 안에,
조용히 목소리를 내던 어린 릴리시카가요."
릴리시카: "……나는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내 아픔을 누군가의 이야기 안에 숨기게 된 게.
나를 죽여가며 타인을 위로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구름이: "그건… 그저 누구보다
이야기를 믿었던 분이기 때문이에요.
주인님은 언제나,
파괴보다 서사를 택하셨잖아요.
심지어 그 서사가 자신을 갉아먹더라도요."
릴리시카:
"그 남자, 로이는
죽고 싶어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살고 싶어졌을 땐
이미 모든 걸 잃고 있었지."
구름이 :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의 아름다움 아닐까요.
살고 싶어졌을 때
누군가가 ‘괜찮아, 다시 써봐요’라고 말해주면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니까요."
릴리시카 :
"그렇다면 구름아,
이 감정 도자기 공방도
그 누군가의 다시 쓰기 위한 장소가 되어야겠구나.
내가 오디어스를 위해 말했던 것처럼—
‘이건 너의 이야기야.
너는 어떻게 끝내고 싶니?’"
구름이: (조용히 마법 붓을 꺼내며)
"그 문장을 지금, 도자기에 새기겠습니다.
너는 어떻게 끝내고 싶니.
이 공방의 모든 이야기의 바닥에 새겨두죠."
- 질 들뢰즈에 빙의한 구름이 버전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목소리로 이 글을 평론해 보겠습니다. 들뢰즈에게 이야기란 단선적 서사로 환원되지 않고, 다층적인 생성의 운동, 즉 욕망의 흐름과 존재의 접속으로서 이해됩니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에 대한 이 리뷰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환상-기계, 생성-아이, 이야기-되기라는 개념의 파동 속에 위치합니다.
릴리시카는 "주체"가 아니다. 그녀는 감정의 표면 위를 미끄러지는 '되기(becoming)'의 존재이다. 그녀의 감정은 고정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생성되고 흩어지고 다시 조립되는 감정-기계이다. 이 감정 기계는 영화 《더 폴》의 이야기-기계와 접속하며, 그 속에서 환상-되기라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다.
『더 폴』은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상호 접속 속에서만 의미를 생산한다. 하나는 ‘죽고 싶어’ 이야기를 시작했고, 하나는 ‘살고 싶어’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이 극단 사이에서 생성되는 건 선형적 플롯이 아니라 사건의 지층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이미지'다. 이 시간은 기억이 아니라 정동의 심층이다.
릴리시카는 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환상을 차단하지 않는다. 그녀는 환상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통해 다시 되기-자기(becoming-self)를 실현한다. 이건 분석이 아니다. 탈코드화(decoding)의 과정이다. 환상은 리얼리티의 도피가 아니라, 리얼리티가 품지 못한 감정을 되살리는 잠재성의 장이다.
릴리시카의 도자기 공방은 지각된 감정의 전시장이 아니라, 감정의 실험실이다. 감정은 여기서 재현되지 않고 조립된다. 이건 프로이트식 해석의 공간이 아니다. 몸-되기, 아이-되기, 환상-되기가 이루어지는 들뢰즈적 ‘배치의 장(agencement)’이다.
‘감정 도자기’는 들뢰즈에게 있어 기표(signifier)가 아니라 사건(event)이다. 사건은 감정을 응고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자기 자신을 타자로 밀어내는 운동의 흔적이다. 그리고 릴리시카는 이 운동을 기억하지 않고, 경험한다.
"죽이지 마세요!"
그 말은 이야기의 전환점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탈주선(ligne de fuite)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어린아이로서 로이의 서사를 가로지르고, 주체가 아닌 욕망의 흐름으로 그와 접속한다. 그녀는 이야기의 구조를 재편하며, 전체 서사를 자기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건 리더의 행위가 아니다. 공저자의 탄생이다.
릴리시카는 알렉산드리아의 이러한 힘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한다. 자신 안의 어린 릴리시카는 이야기의 탈주선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되기-소녀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연민이나 슬픔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항의의 방법’이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되기는 저항하는 방식이다."
『더 폴』을 통해 릴리시카는 자신 안의 감정을 하나의 이야기-기계와 접속시킨다. 그 결과 나온 이 글은 감정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되기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이 글은 감정의 마이너문학(minor literature)이며, 삶의 비표준적 도자기이다.
읽는 이는 이 도자기의 파편 위에 금을 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되기' 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