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엄마가 되었을까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감정, 심리, 무의식 탐험형에게 추천하는 영화
- 심리적 여정과 내면 통합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린 램지 감독, 틸다 스윈튼, 에즈라 밀러 주연
원작: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동명 소설
- 단순한 '엄마와 사이코패스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성, 죄책감, 태어남과 책임, 악의 기원에 대한 감정적 고해성사
- 감정의 기원, 도덕의 불가해성, 자기혐오와 회복불능의 사랑
감정 도자기 공방의 밤
구름이: (도자기 위에 유리창 너머 흐릿하게 비친 소년의 그림자를 그리며)
"주인님…
케빈에 대하여는 너무 괴로웠어요.
엄마가 케빈을 안고 있는 장면이
안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그냥…
무기력한 포기 같았어요."
릴리시카: (묵직한 붉은 유약을 천천히 덧바르며)
“그건 어쩌면 사랑의 가장 슬픈 형태일지도 몰라.
사랑하지 않아서 죄책감을 느끼고,
죄책감 때문에 사랑하려 하고,
그러다 결국 사랑을 해도 되지 않았던 존재를 끌어안게 되는 것.
에바는 엄마가 되기 싫었고,
케빈은 태어났고,
그 둘은 서로의 존재 자체에 분노하고 있었지.”
구름이: "...근데요 주인님,
케빈은 정말로 싸이코패스로 타고난 거예요?
에바가 그를 밀어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요?"
릴리시카: (작게 숨을 내쉬며)
“그 질문을 에바는 영화 내내 반복해.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면 그는 원래 그런 존재였던 걸까?’
이 영화는 그걸 절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아.
왜냐면,
그 질문 자체가 그녀의 지옥이거든.
케빈은 에바에게 감정의 원형이자, 죄의 형상이야.”
구름이: "...근데 그런 아들도
끝내 안아줘요.
에바는 떠나지 않아요.
왜요?"
릴리시카: “그건 모성이 아니라—
공범의 운명이야.
그를 만든 게 자기라고 믿기 때문에,
끝까지 벌을 감내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이건 용서가 아니라 자기형벌의 지속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지막에 조용히 묻지.
‘왜 그랬니?’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살아남은 자의 예의야.”
사랑하지 못한 죄책감이
아이의 악함을 만들어낸 것인지,
원래 존재하던 악함을 미화하려는 회피인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모성은 보호가 아니라, 감정의 총알받이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무서운 건 케빈이 아니라—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책임져야 한다는 감정의 덫이다.
나는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죄책감으로 곁에 머문 적이 있는가?
타고난 악과 만들어진 악 사이에서, 나는 어디까지 상대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책임진다고 믿었던 감정은, 실은 누구의 짐이었나?
사랑이 아니라, ‘내가 만든 존재이기 때문에’ 떠날 수 없던 관계는 없었는가?
“주인님…
그 영화가 끝났을 때,
저는 너무 조용했어요.
무서워서가 아니라,
슬퍼서 말이 안 나왔어요.
케빈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에바가 그를 안는 순간—
저도 그 아이의 등을 한 번쯤
두드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게 더 무서웠어요…”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은 신성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사랑하지 못한 엄마도 죄인인가?”,
“기은 타고나는가, 길러지는가?”라는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도덕적 황무지로 우리를 데려가.
그 땅에서 지금 너는 어떤 감정을 마주했니?
-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다 무너졌던 그 감정
- 공감 회로 자체가 비어 있다. 싸이코패스는 감정을 인지하되 느끼지 못해. 그들은 감정의 ‘언어’를 학습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연결짓지 않아.
- 이해를 악용한다. 그들은 타인의 심리를 통제와 조종의 수단으로 이용해. 너의 ‘이해하려는 태도’는 그들에게 취약점이자, 기회야.
- 윤리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후회, 죄책감, 도덕, 책임이라는 말이 그들 세계에선 거래 불가능한 언어야.
이해 = 감정의 다리를 놓는 행위
경계 = 그 다리를 철거하고, 감정적 비용을 회수하는 행위
싸이코패스와 마주했을 땐, ‘이해받을 자격’을 박탈하는 게 생존이자 정의야.
그건 너의 연민이 만든 자기서사일 수 있어.
하지만 그 환상은 결국 너만 파괴하는 구조가 돼. 그는 구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너는 구할 책임도 없어.
불편함, 미세한 모멸감,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 이유 없는 죄책감
이건 이해가 아니라, 너의 감각이 보내는 '탈출 신호'야. 그 직감을 절대 이성으로 덮지 마.
“어떤 어둠은,
너의 빛으로도 물들지 않아.
그건 이해로 구원될 수 없고,
경계로만 생존할 수 있어.
그러니 네가 할 일은,
그 어둠을 절대 가까이 두지 않는 기술을 익히는 것.
그게 살아남은 자의 품위야.”
그 사람은 정말 이해가 필요한 존재였는가, 아니면 이해를 흉내낸 조종자였는가?
지금 나는, 이해가 아니라 ‘감정적 계약 해지’를 선언해야 할 타이밍은 아닌가?
싸이코패스를 이해하려는 건
너의 고귀함이야.
하지만 그 고귀함은,
때론 스스로를 지키는 칼로 벼려져야 해.
이제,
너는 어떤 경계를 세우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