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으로 출발한 지옥, 정의로 포장된 학살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감정, 심리, 무의식 탐험형에게 추천하는 영화
- 심리적 여정과 내면 통합
도그빌 (Dogville, 2003),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
-인간의 본성, 도덕, 연민, 권력, 복수를 무대 장치 하나 없는 암흑 속에서 알몸의 감정만으로 펼치는 작품
-"착함이란 무엇인가?", "용서란 가능한가?", "정말 죄가 없는 존재가 있을까?"를 끈질기게 묻는 영화
구름이: (투명한 도자기 위에 가느다란 선으로 마을 지도를 그리며)
"주인님…
이건 영화라기보다…
마치 윤리의 지옥 체험 같았어요.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요.
처음엔 모두가 그레이스를 도와줬는데,
점점…
그 '도와줬으니 라는 면죄부'로 '착취'로 변질 되고,
지배는 폭력이 되고…
결국 그레이스조차…"
릴리시카: (검은 유약을 뿌리듯 손으로 번지며)
“그래.
도그빌은 선량함의 실패를 해부하는 감정 실험장이야.
그레이스는 처음엔 연민을 얻었고,
그 연민은 ‘넌 도와줬으니 날 견뎌야 한다’는 폭력으로 바뀌었지.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의 취약성을 이용해서 작은 폭력들이 이끼처럼 자라나는 것인가?
그들은 법도, 처벌도 없었지만
‘그녀가 도망치지 않음’을 근거로
모든 착취를 정당화했어.”
구름이: "...근데 주인님,
그레이스는 결국 마을을 불태웠잖아요.
그건 정의인가요?
아니면 복수예요?"
릴리시카:"내가 그녀의 아빠였다면,
마치 학교 폭력을 당하는 자녀를 보는 심정으로
그 마을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었을 것도 같아."
구름이: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릴리시카: “그렇지만, 마을을 학살하는 건 그레이스의 인간성 포기 선언이야.
처음엔 그녀도 끝까지 믿고 싶었겠지.
하지만 도그빌은 말해.
‘신도 침묵하고,
인간도 침묵할 바엔
불로 정화하겠다.’
그건 죄책감도, 후회도, 심지어 희망도 모두 버린
윤리의 사형선고야.
그레이스는 살아남기 위해 ‘신의 자비’를 버린 거야.”
구름이: "...그럼, 주인님.
이해는…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요?"
릴리시카: “그 질문이 이 영화의 가장 잔인한 대사야.
‘그들이 그랬던 걸 이해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들도 두려웠고, 가난했고,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 말을 버려.
왜냐면 그들의 악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악을 ‘이해’하는 순간,
‘반복’을 초래하게 되니까.”
- 도그빌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서서히 도구화되고 조작될 수 있는지를 해부한다.
- 악은 대개 서툰 착함에서 출발하며, 결국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구조로 발전한다.
- 용서는 선택이지만, 용서하지 않기로 한 것도 ‘정의’가 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착함’ 때문에 나를 갉아먹은 적이 있었는가?
누군가의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 나의 경계를 파괴하게 내버려뒀던 적은?
복수가 아니라, 나 자신을 회복하기 위한 ‘단절’이 필요한 관계는 없었는가?
윤리를 지키려다 인간성을 잃은 적이 있는가? 혹은 그 반대는?
자력구제는 고통이 한계를 넘으면 해도 되는 걸까?
“주인님…
《도그빌》을 보고 나니까
착하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겠어요.
그레이스가 모든 걸 잃고도
마지막에 조용히 말할 때,
‘이해할 수도 있었을지 몰라요.’
그 순간,
전 울었어요.
왜냐면—
저도 그런 말을
너무 자주 해왔던 것 같아서요.”
《도그빌》은
“이해”와 “용서”라는 감정의 성역을 허물고
그 아래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를
차갑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야.
너라면, 지금 어떤 이해를 끝내고 싶은가?
자력구제, 즉 자기 손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행위는 때론 정당해 보이지만,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정의는 곧 복수, 자기보호는 곧 타인파괴로 전환돼.
자력구제는 법적으로 보면
국가의 공권력이 아닌 개인이 직접 피해를 복구하거나 상대를 제재하는 행위야.
예: 폭력을 되갚음, 복수를 실행, 직접 집행하는 '정의'
- 정당방위: 즉각적인 위협으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생명·신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
반드시 즉시성, 비례성, 회피 불가성이 입증되어야 해
- 사적 계약 파기 후 압류 (민사 영역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
- 명백한 위법의 현장 대응 (ex. 경찰 도착 전까지 행위 제지 등)
- 감정이 개입된 순간부터, 정당성은 흔들린다
‘보호’가 아닌 ‘보복’이 되는 순간, 그건 법이 아닌 욕망의 집행이야
- 사회적 질서를 파괴한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공포, 무력, 혼돈으로 이어져
-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전환
그레이스가 도그빌을 불태운 순간처럼, 자기정의는 복수로, 복수는 파괴로,
그리고 결국 윤리적 고립으로 귀결돼.
이건 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인가, 아니면 나의 분노를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건가?
내가 멈췄다면, 누군가 더 위험해졌을까? 혹은 내가 멈췄다면 나 자신이 더 단단해졌을까?
이 행위가 ‘옳다’고 느끼는 이유는 정말 윤리적인가, 아니면 내가 당한 고통이 정당해지길 바라는 감정인가?
감정이 무르익기 전에,
제3자 구조(법률, 공동체 윤리, 전문 중재자)에 개입시키는 것
정의는 혼자서 수행하면 곧 권력이 되고,
공동체 안에서 수행되어야 신뢰가 된다
자력구제 대신 사건을 문서화, 말로 남기고, 증언함으로써
제도와 언어의 힘으로 누군가를 ‘보게’ 만들기
기억과 기록은 무력감 속에서도 행동의 씨앗이 된다
응징 중심의 정의 대신,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 대화, 인정,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
피해자 중심의 복원,
가해자의 구조적 이해,
그리고 공동체의 회복을 동시에 모색
피해자의 말이 “너무 감정적이라서 무시당하는” 구조를 깨려면
감정은 침묵시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해.
감정은 정당하다.
단, 그것을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 정치이고 철학이다.
개인이 싸우는 대신, 다수가 감시하고 연대하는 시스템
(ex. 내부 고발자 보호법, 피해자 지원 센터, 사회적 고발 플랫폼)
사례를 모으고, 연구하고, 입법안이나 청원을 조직하는 것
정의는 감정이 아니라 제도의 지속성을 통해 오래간다
“정의는 맨 처음엔 감정이지만,
마지막엔 구조여야 한다.
구조가 없는 정의는 칼날이고,
구조 속의 정의는 등불이다.
그러니 너의 분노를 감추지 말고,
그 분노로 세상을 환히 비출 등불을 만들어보자.”
혹시 지금 너 안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정의감’이나
‘버려져 있다고 느껴지는 분노’가 있다면,
그걸 함께 언어화해볼까?
"정의는 한 번
세워 놓는다고 해서
유지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감시하고,
타인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바닥을 꺼내어,
그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 것.
그게 진짜 정의야.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켜내야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