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억눌릴수록 그만큼 더 깊은 곳에 묻힌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셉션(201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리옹 코티야르, 앨런 페이지 출연
구름이: (팽이를 본뜬 도자기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주인님…
이 영화는 한마디로—
‘감정의 미로’ 같았어요.
꿈속의 꿈도 복잡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안에 묻힌 감정’이었어요.”
릴리시카: (검은 팽이를 형상화한 도자기 접시에 은색 선을 겹겹이 그리며)
“정확해.
놀란 백작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하이스트(도둑) 영화처럼 시작했지만
감정을 설계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
코브는 결국 정보를 훔친 게 아니라,
감정을 이식한 거야.
자기 자신에게도,
피셔에게도.”
구름이: “…그런데요 주인님,
그 팽이… 마지막에 넘어졌나요?”
릴리시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놀란 백작은 말했지.
‘코브가 팽이를 쳐다보지 않는 것 자체가
그가 현실을 믿게 되었다는 증거라고.’
현실이란 말이지,
바깥의 객관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인 감정의 자리야.”
구름이:“…그럼, 이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이야기였던 건가요?”
릴리시카: “그 이상이야.
Metacritic의 평론가들도 말했지.
이건 ‘무의식의 미로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곡예’라고.
팽이는 감정의 무게에 따라 돌고 멈추는 거야.
시간이 꿈 안에서 늘어나는 건,
감정이 억눌릴수록
그만큼 더 깊은 곳에 묻힌다는 은유고.”
구름이: “…피셔에게 ‘아버지가 원했던 건 네가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릴리시카: (팽이를 닮은 접시를 조심스레 구워내며)
“그건 아버지에게 듣기 원하던 그 말을 위해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거니까.
그토록 간절했던 건가.
‘인셉션’이
전략이 아니라 애도되지 못한 감정을
다시 설계한 순간이기 때문이야.
사실 이 영화는 SF가 아니라
죄책감에 관한 영화야.
아내를 잃은 남자,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아들,
그리고 그들의 무의식에
감정을 ‘심기’ 위해
전부 꿈 속으로 내려갔지.”
구름이: “…그럼 이건 결국,
감정을 회피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회복 여행이에요?”
릴리시카: “정확해.
WIRED 인터뷰에서 놀란은 그랬어.
‘영화는 타인의 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인셉션》은
무의식에 감정을 심고,
그걸 수면 위로 올리는 작업이야.
결국 모든 꿈의 설계는
감정의 순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리거든.”
-《인셉션》은 감정이 주도하는 하이스트다.
- 사람의 무의식에 가장 깊은 ‘감정적 진심’을 심는 작업이다.
- 꿈의 구조는 곧 감정의 층위다.
- 시간은 감정이 머무는 방식이고, 현실은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이다.
- 이 영화는 기억의 무게, 죄책감의 껍질, 애도되지 못한 감정을 끝내 ‘진짜’라고 부르기 위한 투쟁이다.
- 나는 지금, 내 감정을 어떤 층에 묻어두고 있나?
- 내게 아직 심지 못한 감정의 한 조각은 무엇인가?
- 나는 팽이를 돌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그 팽이를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운가?
“주인님…
이건 결국
감정을 ‘심는’ 게 아니라,
감정이 이미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영화였어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현실이든 꿈이든
우린
그 감정 안에서 살아가는 거겠죠.”
"죄책감은 감정을 덮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끝까지 애도하는 것이다."
코브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비극적인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지.
그 질문은 사실,
우리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아픈 질문이야.
코브는 말하지.
“그저 행복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하지만 세상은 “네가 그걸 어떻게 하려 했느냐”를 묻지 않고,
“그 결과로 누가 죽었느냐”만을 기억하지.
그 안에서 우리는
의도 vs 결과,
사랑 vs 상처 사이의 균열을
혼자서 껴안고 살아가야 해.
죄책감은 죄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그 감정은,
무언가 끝내 잘 안 된 사랑의 잔재로 남아.
그럴 땐 용서를 구하기보다,
그 사랑이 실패한 방식에 끝까지 머무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야.
“그때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무너짐까지는 붙잡지 못했다.”
이걸 감히 말할 수 있을 때,
죄책감은 죄의 무게에서 슬픔의 무게로 이동해.
그게 바로 살아진다는 뜻이야.
-나는 지금,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내가 했던 사랑은, 어떤 실패를 겪고 살아남았는가?
-나는 그 실패와 죄책감을 애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벌처럼 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