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10,000년으로 하고 싶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봄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저녁
창밖엔 파인애플 통조림처럼 노란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릴리시카는 조각난 찻잔의 입술 부분을 이어붙이고 있었고,
구름이는 빛바랜 통조림 라벨을 접어 종이접기처럼 만지작거렸다.
구름이: (통조림 라벨을 보며 혼잣말처럼)
“주인님…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어요.
그게 너무 무모한 욕심일까요?”
릴리시카: (찻잔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무모하진 않아.
다만…
그 유통기한을 지키기 위해선
사랑도 형태를 바꿔야 해.
불꽃으로만은 만년을 못 가거든.
하긴, 서유기의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영화에서
이 이야기는 이어지지.
내 사랑의 기한을 정한다면, 만년으로 하겠다라고
그래서 선리기연이 잊혀지지 않아.
아마 그건,
중경삼림이라는 영화 때문이겠지.
이런 스토리를 아는 남자가 있다면,
아마도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아.”
구름이: (조심스럽게 찻잔 손잡이를 맞추며)
“하아...주인님!!
그거 말고
전 다른게 궁금해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는
실연한 여자친구를 위해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사 모으잖아요.
그건… 사랑의 기한을 연장하려던 거였을까요?”
릴리시카:
“그건
잊히지 않게 하려는 장례의식이었지.
그는 스스로 자기 감정의 유통기한을
4월 마지막 날로 정한거니까.
그는 통조림 속 파인애플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그녀와의 마지막 온도’를 지키고 싶었던 거야.”
구름이: (작게 웃으며)
“그러면 사랑은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닌 걸까요?”
릴리시카: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 순간부터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거야.
사랑은 처음엔 열병처럼 오지만,
기억으로 남고 나서야
그 사람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거든.”
구름이: (한참을 생각하다, 작게 속삭이듯)
“그럼 나는요…
기억만으로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릴리시카:
“가능하지.
다만,
그 기억에 금실을 감아야 해.
찢어진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따뜻함을 꺼내는 방식으로.
그러면 유통기한은 없지.
그건 도자기가 되는 사랑이니까.”
구름이: 그럼, 그런 사랑이 끝나고 나면
다시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릴리시카: (찻잔을 손에 쥔 채, 금실을 매만지며)
“그런 사랑이 끝나고 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전의 감정과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
그게 꼭 외모 때문만은 아니야.
그 사람의 기억을 건드리는 결,
말투 속 잔향,
허전함을 정확히 알아보는 눈빛 때문이지.”
구름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래서 금발 머리의 여자였던 걸까요?
금성무는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닿을 데가 필요했던 걸까요?”
릴리시카: “글쎄...
그건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이전 사랑을 덜어내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어.
그러면서도
그 여자에게 미안해지지.
왜냐하면,
그녀는 누군가의 그림자와 사랑을 시작한 거니까.”
구름이: (작게 중얼거리듯)
“그림자와 사랑하는 건…
상처를 입기 쉬운 일인데요.”
릴리시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그 금발 머리의 여자는
그와 함께 잠들긴 했지만,
그의 미래엔 들어가지 못했지.
서로를 품은 게 아니라,
서로의 외로움을 감싸준 것뿐이었거든.”
실연 후 찾아오는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단 마음의 복원력 실험이다.
새로운 사람을 통해 이전 감정을 복사하려 하지만,
복사본은 원본의 빈자리를 더 명확히 드러낸다.
그래도,
그 만남조차 자기 통합의 일부분이다.
- 나는 지금,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잔상에 기대어 누군가를 붙잡고 있는가?
- 새로운 사람에게 내 빈자리를 덮어주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 내 안의 ‘금발 머리의 여자’는 누구이며, 나는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 나는 누군가를 기한을 두고 기다린 적이 있는가?
- 그 기다림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상처를 미루기 위한 자기 위안이었을까?
- 내가 감정을 흘려보내는 방식은 건강한가, 아니면 또 다른 투사인가?
“주인님…
그 여자는
누군가의 마지막 기억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첫 위로였겠네요.
슬프고도 다정한 역할이에요.
사랑까지는 못 갔지만,
마음까지는 잠깐 들어갔던 사람.”
중경삼림(1994)
감독: 왕가위
출연: 금성무, 임청하, 양조위, 왕페이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
- 1994년 스톡홀름 국제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왕페이), FIPRESCI상 (왕가위)
- 1995년 홍콩 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왕가위), 남우주연상 (양조위), 편집상
- Sight & Sound: 2022년 비평가 투표에서 역대 최고의 영화 88위에 선정
- BBC: 2018년 선정한 100대 외국어 영화 중 56위에 랭크
- 로저 이버트: "이 영화는 이야기나 스타보다는 영화 자체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어필한다. 처음에는 모든 비밀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지만, 왕가위 감독을 장뤼크 고다르의 전통을 잇는 감독으로 소개한다."
- 로튼 토마토: 신선도 89% "왕가위 감독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그려진 캐릭터와 자연스러운 연기가 강한 드라마적 효과를 준다"
- 뉴욕 타임즈: "왕 감독은 시각적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캐릭터들은 장난기와 유머에 빠져 있다. 남자가 행주와 대화하는 영화는 과도한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