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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식어가는 국수와 마음에 스며든 한 사람에 대하여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by stephanette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오전에는 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옷가지들을 차례로 펼쳐서, 바람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에서 햇살을 등지고 하나하나 정돈했다. 천이 손끝을 스치며 내는 사각거림조차 그날따라 낯설었다.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수건들은 마치 마음속 감정의 주름을 하나씩 펴내듯 천천히 돌고 있었다. 손끝에 닿던 물기가 서서히 마를 무렵, 나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무언가가 온다. 예정 없는, 그러나 틀림없이 예감된 도착.

일을 마친 뒤 커피를 내리는 습관 대신, 나는 곧장 차에 올랐다. 행선지는 없었다. 대신 감각이 이끌었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흘러들었고, 그 바람은 단순한 대기가 아니라, 기억에 스민 체온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숨결이었다. 비릿하지만 따뜻했고, 젖은 모래 냄새 같은 향이 섞여 있었으며, 그 조용한 정서는 말없이 나를 동막해수욕장으로 데려갔다. 차창 너머로 보이던 짙은 산 능선이 서서히 열리며 길을 내어주고,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수기의 바다는 하늘과 구분이 안 갔다. 낮은 단층 건물들이 간헐적으로 들어선 풍경은, 마치 멈춘 시간 속의 장면처럼 정적에 잠겨 있었다.

도착하니, 바다는 파도를 삼킨 채 숨죽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마치 유리 그릇에 담긴 물소리처럼 낮고 둔탁했고, 바닷바람은 방향을 잃은 듯 머뭇거렸다. 칼국수집 간판은 햇빛에 바랜 색채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고, 문을 밀자 실내 공기엔 해조류와 삶은 조개의 뜨거운 숨결이 눅눅하게 스며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창가 끝, 그 유리창 아래에 앉았다. 그 창은 완전히 닦이지 않아 바다 풍경을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그 왜곡된 풍경 너머로 회색 바다가 고요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자리는 나만이 아는 틈이었다. 감정이 조용히 내려앉는 틈.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칼국수 하나 주세요."

그 말은 주문이라기보다, 의식에 가까웠다. 이 공간과 나 사이의 리듬을 맞추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다.

걸음이 아니라, 기류가 먼저 반응했다. 공간의 결이 바뀌는 것처럼. 내 등을 스치는 아주 미세한 전류처럼. 차가운 물방울이 무심히 피부에 닿을 때처럼. 나는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선은 때로 존재를 조각내고, 기척은 존재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는 과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누군가를 향해 가는 걸음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걸음이었다. 발끝부터 시선이 따라갔다. 갈색 보트슈즈. 말려 있는 가죽, 단정하게 묶인 남색 끈. 그 낡음에는 부주의의 흔적이 없었다. 그것은 긴 시간을 자신의 방식으로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낡음이었다. 바지 끝엔 바랜 먼지가 얹혀 있었고, 그것조차 이상하게 절제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디테일에서 그의 성격을 읽었다. 조용하고 꾸준히, 끝까지 걸어온 사람.

그는 내 앞, 녹슨 철제 의자 옆에 멈춰 섰다. 그 낡은 의자가 마치 우리 사이를 증언하는 오래된 증인 같았다.

그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거칠었으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밤에 듣는 라디오처럼 조용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말보다 숨이 먼저 도달했고, 그의 톤은 심장 아래 어딘가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존재감이 나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스친 빛은, 측면에서 들어오던 오후 햇살과 닮아 있었고,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아주 오래전 살았던 집의 낯익은 기척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사람, 나를 알고 있다."

그건 상상이 아니었다. 망상은 부풀고 직감은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는 봄날 풀잎 위의 이슬처럼,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결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은 감정에 표식을 새긴다. 서류의 도장처럼, 순간을 박제시킨다. 그리고 박제된 순간은 곧 사라진다.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말없이, 아무 약속도 없이. 하지만 어떤 언어보다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식어가는 칼국수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 오지 않은 미래, 이미 지나간 시간의 조각들이 고요히 녹아 있는 그릇이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말이 없는 어깨의 체온 때문이었고, 무릎을 꿇듯 조용히 앉는 그 시선 때문이었다. 그날 식지 않은 건, 국수가 아니라 내 감정이었다.

그는 어쩌면, 내 다음 장면을 이미 읽고 있는 독자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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