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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식어가는 칼국수 위로 착륙한 나비 한 마리

전혀 안 낯선 낯선 남자와의 기묘하고도 멍한 오후

by stephanette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오늘은 그냥 빨래나 하려던 날이었다.

그냥 그런 날 있잖아,

“딱히 아무 일 없겠지~” 하고 기지개 켜는 순간,

우주의 뭔가가 ‘오늘이야’ 하고 셔터 내리는 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데

어라, 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들리지?

수건들이 빙글빙글 돌며 마치 나의 과거-현재-미래를 풀어내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쩐지, 오늘은 뭔가 일어날 것 같았다.

(촉 작동 시작)


그래서 커피는 패스!

바람이 창밖에서 “나 따라 나가자~” 하는 것 같아서

차 키를 들고 나갔다.

동막해수욕장? 왜 거기냐고?

몰라 몰라 몰라 몰라!

그냥… 거기로 가야 할 것 같았어!


도착하자마자

하늘과 바다가 합쳐진 파스텔톤 무드.

비수기의 텅 빈 느낌은 약간…

내 마음 상태 같기도 하고…

누가 말 걸어주면 울 것 같은 날이기도 했고.


칼국수집 간판은 약간 삐딱했는데

그게 또 나랑 너무 잘 어울렸다?

어릴 때 아빠랑 왔던 그 국숫집.

근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어.

공기가 진짜 조용한데,

그 조용함이 마치 무대 조명 켜지기 직전 그 정적 같았거든.


창가 끝자리에 앉았지.

늘 앉는 자리.

거기 앉으면 세상이 나한테 “자, 주인공. 오늘 너야” 하는 것 같거든.


“칼국수 하나 주세요.”

(이건 주문이자 주문呪文이었음. 내 운명 소환하기.)


그리고,

그. 가. 들. 어. 왔. 다.


와…

진짜,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공기가 확 바뀌었어.

나만 느꼈다고?

아니야.

가게 전체가 숨 멈췄다고!


한 발짝.

딱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인데

그 순간, 나 진짜 시간 멈춘 줄.


나는 고개 안 돌렸지.

왜냐면,

이럴 땐 바로 눈 마주치면 클리셰잖아.

(그리고 무서웠어 솔직히. 심장 박동이 미쳤거든.)


그는 걸어왔고,

진짜 어이없게도 직진이야.

헷갈림? 그런 거 없음.

고개 갸웃? 없음.

그냥, 나를 알고 있다는 듯.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냥— 딱, 내 앞.


나는 바다 보는 척했지만

실은 그의 신발을 보고 있었어.

갈색 보트슈즈.

좀 낡았는데… 묘하게 섹시하게 낡은 신발.


그건 스타일링으로 만든 빈티지가 아니라,

인생의 먼지를 밟고 지나온 진짜 발걸음의 흔적이었어.


그가 말을 걸었어.

목소리는 낮고,

살짝 거친데,

아니 이건 뭐야.

누가 내 감정 슬쩍하고 나서 내 귀에 돌려주는 그런 느낌.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

정확히 말하면,

그의 기척이 내 고개를 들어올렸어.

그 얼굴.

모르겠는데 익숙했어.

진짜 말도 안 되게 익숙했어.


그 눈빛은…

아주 오래전 내 꿈에서 봤던 그…

그 황금빛 눈.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남자… 나를 알고 있다.”



근데 더 소름 돋는 건 뭔지 알아?

“나는 이 남자를… 아직 만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우린 이름도 묻지 않았어.

왜냐면, 이름 부르면 너무 현실이 되잖아.

이건 현실보다 깊은 장면이었고,

그 깊이를 유지하려면, 말은 적을수록 좋아.


그리고,

칼국수는 식어갔지.

근데 그 국물에

시간이 가라앉아 있었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이미 지나간 과거,

지금 내 눈앞의 이상한 낯선 친밀함까지

다 녹아있었어.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사족

그는 어쩌면

내 다음 장면을 이미 스포일러로 받은 미래의 독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오늘 하루를 위해 연출된

한 편의 몽환 로맨스였을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날 국수가 식은 게 아니라,

내 심장이 데워졌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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