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이름을 묻지 않았고, 나는 그의 낡은 구두를 기억했다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어떤 날은 도무지 이유가 없다. 아침엔 세탁기를 돌렸다. 사각거리는 수건, 고요한 기계음, 반복되는 회전. 아무 감정 없이 시작된 하루였다. 그건 마치, 오래전 끝난 슬픔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신 같았다. 그렇게 빨래를 짜듯 생각을 비워내고, 나는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없었다. 아니,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도로는 표시되지 않는 곳이었다. 내 안의 어떤 기억이 나보다 먼저 방향을 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몸은 그 기억을 따라간다. 늘 그렇듯, 무의식이 앞서 걷는다.
동막해수욕장. 오래된 바다 냄새와 주황빛 페인트 냄새가 섞인 골목. 바람은 어느 쪽에서도 불지 않았다. 바람조차도 방향을 잃은 듯했다. 칼국수집 간판은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삐뚤어진 문장처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왔던 그 자리. 오래된 기억은 늘 소리를 잃은 필름처럼 재생된다. 나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창가 맨 끝. 익숙한 자리. 익숙하다는 말은 슬프다. 익숙함은 상처가 굳었다는 뜻이니까. 창밖은 바다였다. 하지만 그날의 바다는 이상하게도 무표정했다. 갓 빨아 널지 못한 이불처럼. 촉촉하고 무겁고, 차가운 불안감으로 나를 덮었다.
나는 말했다. “칼국수 하나 주세요.”
목소리는 너무 익숙해서, 나조차 놀라지 않았다. 내 말에 직원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빛도, 표정도, 감정도 없는 접수. 세상엔 서로를 알아보지 않고도 서로를 지나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그날의 우리처럼.
그리고—그가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공기가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기보다 먼저 무언가가 나를 흔들었다. 공기에는 기억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내 몸은 먼저 반응했다. 그의 기척이, 내 무릎 아래로 스며들었다. 말없이, 아주 익숙하게. 나는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실은 그의 발을 보고 있었다. 오래 신은 갈색 보트슈즈. 낡은 가죽 위에 얹힌 먼지. 그 낡음은 태만의 결과가 아니라, 오래 걸어온 사람의 자취 같았다. 무너짐이 아니라 내력이었다.
그가 가까이 왔다. 말없이 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기척이 나를 끌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 기억 속엔 이미 살고 있었다. 그런 기분. 우리는 아직 서로를 만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두렵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다만... 익숙했다.
그는 내 이름을 묻지 않았다. 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람은 낯설어진다. 이름은 명찰이고, 명찰은 사회적 거리다. 그날의 우리는 이름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다시 앉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칼국수는 식어갔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건 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식어가는 국수엔, 말하지 못한 기억이 스며 있었다. 국물이 증발시키지 못한 감정들. 그건 조개가 아니라, 전생에서 넘기지 못한 문장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가 정말 미래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사족
이야기는 끝났지만, 인연은 아직 어딘가에 말을 거두지 않았다.우리는 서로를 처음 보는 얼굴로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식어버린 국수 위에 남은 기척 하나가, 다음 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