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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칼국수와 전생 남친

누구냐고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by stephanette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장면: 동막해수욕장 근처의 오래된 칼국수집.

시간은 평일 오후. 적당히 조용하고, 평년보다 낮은 온도)


[내레이션 / 주인공 속마음]

“원래는 그냥 점심 먹으러 간 거였어.

세탁 돌리고, 드라이브 잠깐 하고, 칼국수 한 그릇—끝.

별 거 없는 날이었지.”


(입장하자마자 생각)

“…근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정리될 것 같은 느낌은 뭐지?”

바닷바람은 멍청하게 헷갈리고, 간판은 반쯤 쓰러져 있고.

나도, 사실 좀 휘청이고 있었지.


(주문하면서)

“칼국수 하나요.”

(속마음) 메뉴판? 굳이. 직원? 서로 눈 마주치지 않음.

칼국수는 그렇다 치고, 내 감정은 뚝배기에 담아 끓이기도 벅차다.


(그때 – 문이 덜컥 열림)

“……?”

공기가 바뀌었다. 진짜다.

에어컨 튼 것도 아닌데 습도 갑자기 확 떨어짐.

몸이 먼저 알아챔.


(그가 등장)

정말로 망설임 1도 없이 내 쪽으로 걸어옴.

아니 눈치라는 게 있으면 한두 걸음은 카운터 쪽으로 갔다 오지 않나?


(속으로 발부터 봄)

보트슈즈. 많이 신었는데 이상하게 고급스러움.

그 닳은 신발이 말하는 것 같다.

“나 과거 좀 있음.”


(말 걸자마자 속마음 터짐)

그 말이 뭐였는진 기억 안 나.

근데 그 톤이, 그 음색이,

내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가 발끝에서 땀처럼 빠져나옴.

아 이거 안 좋은 예감이다.


(그제야 얼굴 봄)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인데, 낯설지가 않다.

나는 처음 본 것 같은데,

그 사람 눈에는 내가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이름을 묻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왜냐면 이름을 물으면 이게 뭔 관계인지 규정해야 하거든.

지금은 그냥,

칼국수 하나씩 앞에 두고

아무 말 없이 같이 있는 게 더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나레이션)

국수는 식었다.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인연인지, 뭐가 지나간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혹시…

그 사람,

진짜 전생에서 국물이라도 나눠 먹은 사람 아니었을까?


“그날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는데,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버렸다.”


[크레딧 음악: 칼국수 국물 끓는 소리 + 브금 같은 기타 잔잔한 곡]


에필로그 씬 (1년 후, 같은 자리)

직원이 새로운 손님한테 말함:

“여기요? 가끔 앉아서 국수도 안 먹고 멍 때리다 가는 분들 계세요.”

그 손님은 어리둥절.

근데 우리는 안다. 거기, 그 자리엔 기척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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