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봄, 식어가는 국수 앞에서 대감을 알현하였사옵니다.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등장인물
- 혈맹 제3대감: 침묵으로 모든 것을 가늠하는 무관 출신의 조정 고위 인물.
- 릴리시카 여인: 감정 연금술을 은밀히 다루는 내명부의 여인, 환생의 기척을 읽는 능력 보유.
[장면: 동막포 바닷가. 조용한 국수집. 여인 하나가 창가에 홀로 앉아 있노라면,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낯선 이가 들어선다.]
릴리시카 여인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린다):
“이리도 고요한 날, 저 물비늘에 스며든 바람이 어찌 이리 낯익을 수 있사옵니까...”
혈맹 제3대감 (묵직한 걸음, 말없이 다가와 한 칸 너머에 앉는다):
“바람이란 것은, 여인이 숨을 고르듯 돌아오는 것이니… 낯익다 한들 괴이할 일은 아니지요.”
릴리시카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대감... 소녀, 이 몸, 낯설게 뵈옵니다만… 심장은 오래전부터 익히 아는 듯 두근거리옵니다.”
혈맹 대감 (조금 머뭇이며):
“노회한 이 몸이 보기에 그대와의 인연이 오늘 시작되었음에도, 그 끝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오.”
(칼국수가 나오나, 둘은 젓가락조차 들지 않는다.)
릴리시카 (미소 짓되, 쓸쓸함이 맺혀 있음):
“이 한 그릇 국수, 어찌 이리 무겁사옵니까. 이 국물에 스민 것은 조개가 아니라, 전생의 밀서인 듯하옵니다.”
혈맹 대감:
“그대의 혼백이 먼저 도착한 것이겠지요. 나는 단지... 그 여운을 따라 이곳에 이르렀을 뿐이오.”
(잠시 침묵)
릴리시카:
“대감, 오늘 이 자리가 예견된 자리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소녀, 감히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혈맹 대감 (고개를 젓는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이 만남이 현실로 굳어지지 않겠소. 그리되면, 이 낭만도 바람 앞의 등불일 터…”
릴리시카 (눈을 감고 말한다):
“허면, 소녀는 이 인연이 이름 없이 기억 속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그리 생각하면 되시겠습니까?”
혈맹 대감 (고개를 숙이며):
“기억이 머문 곳이라면, 그곳은 곧 다음 생의 문턱이 될 것이오.”
(창밖, 물결 위로 노을이 스민다.)
릴리시카 (속삭이듯):
“대감은 이 몸을 기억하고 있었고, 소녀 아직 님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었사옵니다…”
사족(史足):
이야기는 끝이 났으되, 인연은 아직 말을 거두지 않았도다.
식어가는 국수는 한 시대의 마음이고,
그날 동막포에 불던 바람은 다음 생의 기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