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럼 시를 한 수 읊어 볼게요.”
연말 모임에서 시를 읊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십수 년 전 중2병보다 무섭다는 대리병에 걸려 있을 때 1차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다분히 의도가 담긴 병증에 의한 행동이었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의식의 발로였다.
내가 읊은 시는 박노해 시인의 ‘올 해의 귀인’이라는 시다. 이 시를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매년 연말이 되면 나만의 ‘귀인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짧은 시간 여행이 끝나고 나면 저절로 감사함이 올라온다. 그들 덕분에 안도하고, 그들 덕분에 더 크게 웃고, 그들 덕분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몇 해 동안의 리스트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또 색다르다. 그 기간 동안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그뿐이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의 일상이,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함께 보인다. 삶의 교차로에서 잠깐 스쳐간 인연들은 귀인 리스트에 올라오지 않기에, 마음 쓰지 않고 떠나보낼 수 있다. 반대로 몇 해 동안 리스트에 오른 사람이 있다면 감히 ‘동행’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내가 연말모임에서 이 시를 꺼내든 것은 모임 멤버들이 올해 나의 ‘귀인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을 오롯이 전하기 위해서 시를 읊었던 것이다. ‘시를 좋아한다’는 말은 언젠가부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말을 건너뛰고 바로 시를 읊은 것이다. ‘시를 좋아하는 나’는 나다움의 일부이며, 나다움이라는 것은 심리적 안전감이 확보된 순간에만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올 해의 귀인
박노해
12월의 밤이 깊으면
고요히 방에 홀로 앉아
수첩을 펴고 한 해를 돌아본다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
올해의 귀인은 누구였던가
나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나던
올해의 시간은 언제였던가
세상을 조금 더 희망 쪽으로 밀어 올린
올해의 선업은 무엇이었던가
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올 한 해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던가
누구에게 모질었던 그늘이었던가
누구를 딛고 올라선 열정이었던가
가만가만 눈이 내리고 여명이 밝아온다
새해에는 나 또한 누군가의 선물이 되고
별의 시간이 되는 올해의 귀인이기를
시 낭송이 끝나고 난 후 1년 동안의 소회를 함께 나눴다.
2023년 열심히 살아냈던 각자의 빛났던 시간을 떠올렸다.
힘들게 버텨냈던 시간들을 위로했다.
선물처럼 다가온 서로의 인연에 감사했고,
2024년 누군가의 선물이 되고 귀인이 될 생각에 설레었다.
올 해의 귀인 리스트를 정성스럽게 작성하면서 나는 나다움에 대하여 생각할 뿐 아니라, 리스트 위에 있는 한 분 한 분의 ‘나다움’도 함께 떠올려 보았다. 그들 또한 나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충분히 그들 다움으로 빛나는 시간이 되었을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