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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심산책자 Jan 03. 2023

취향의 발견! 엄마는 고급 취향!

연말에 예상도 못했던 선물이 하나 생겼다.

평생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Fine Dining 레스토랑 티켓.


나는 살면서 음식에 진심인 적이 없던 사람이다. 대학시절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배꼽시계가 신호를 알릴 때에만 밥을 먹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밥때만 되면 연락을 해와서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 내느라 고역이었다. 그땐 진심 그 친구가 밥 먹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스트레스였다. 


요즘엔 맛집 리스트를 수집하고 도장 깨기 하듯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먹는 맛집도 별로다. 특히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맛집 탐방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가고 싶은 곳 동선에 있는 식당에서 허기를 달래는 것만으로 괜찮다는 주의다.


이런 나이기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만찬을 즐길 기회가 생긴 것은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유명 셰프가 직접 만들어 주는 만찬 행사를 기획만 하고 먹어보지 못한 것이 조금의 아쉬움으로 남았었는데 때마침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정도의 기분 좋음이었다.


12월 31일. 우리 가족은 엄마를 모시고 그곳에 갔다.

첫 방문길. 검은색 간판은 보이는데 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입구를 이렇게 해두면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올까 고객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 입구에 도착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천정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던 샹들리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수많은 사진들, 와인잔과 와인셀러,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고급스러움'이 부담스럽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안내받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한 껏 차려입은 엄마에 비해 나의 행색이 굉장히 초라했다. 

평소 스타일보다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나조차도 옷을 의식하게 만드는 분위기라니.

그런데 지긋한 연세의 지배인이 옷을 받아 줬다. 

이 즈음되니 '날 좀 가만 놔두세요.'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점점 더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런 나의 기우를 날리는 순간이 찾아왔으니, 바로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고 난 후였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거였는데, 연말 기념으로 식당에서 마련한 작은 선물이었다. 마치 프러포즈 반지와 같이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아주 예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선물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들은 반지를 끼고 신이 나서 인증숏을 찍어댔다.


이제 만찬을 즐길 차례.

음식이 하나씩 나오고, 음식에 대한 간단한(길게 하면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딱 적당했다) 설명을 들은 후 맛을 보았다.

프랑스 요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 엄마! 엄마에게 이 음식이 맞을까 가장 염려됐다.


내가 그런 걱정을 데는 아주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몇 해 전 엄마를 모시고 대만 여행을 갔을 때였다. 대만 여행의 꽃 중 하나인 태각로 협곡을 트레킹 하고 하다가 엄마가 충격적인 한 마디를 날리셨다.

"엄마! 여기 진짜 멋지지?"

나에게 협곡의 자태야 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장관이었다.

"그냥 뭐 그러네. 여기저기 다녀봐도 설악산만 한 곳이 없더라."

태각로 협곡이 설악산에 의문의 일패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난 엄마 입 속으로 들어가는 푸아그라를 지긋이 응시하며, 태각로 협곡이 설악산보다 못한 그저 그런 곳이 되었던 그때와 같은 상황을 예감했다. 

"엄마! 맛 어때?"

그런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본다며 너무너무 맛있다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엄마는 그 이후로 나오는 난생처음 맛보는 미식의 세계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엄마에게 음식 가격을 밝히지 않았지만, 엄마는 육감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최대치로 즐겨야 한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언니의 지인이 보관해 두었다던 고급 와인을 한잔씩 마셨는데, 엄마가 와인을 그렇게 잘 드시는지 처음 알았다. 노년의 엄마가 술을 드시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는데, 정말 작정하신 것 같았다.

"엄마! 여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야."

언젠가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선물이니까 그렇지 내 돈 주고 먹었더라면 소화도 못 시킬 지경의 가격하며, 평생을 검소하게 아끼며 살아오신 엄마의 성정을 생각할 때 다시 올 곳이 아니었다. 


"와! 정말 이렇게 맛있게 먹은 거 오랜만이네. 진짜 맛있다. 나중에 또 사줘."


엄마가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뭐가 필요하냐고 묻는 순간에도 습관처럼 필요한 것 없다고 답하는 엄마였다. 이런 엄마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짠한 마음이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변했다. 난 이런 순간, 어쩌면 엄마 스스로도 몰랐을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새롭고 또 반갑다.

 

예상하지 못했던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았던 2022년의 마지막 날.

고급 음식을 먹어본 경험보다 엄마의 취향을 발견한 것이 또 다른 큰 선물이었다.

아! 2023년에도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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