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목욕은
올해 초 유럽 여행에 다녀온 나의 단짝 친구 영주는 "너가 목욕을 되게 좋아하잖아." 라며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의 'Nude in the Bath' 그림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자타공인 목욕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 된 나의 목욕을 대하는 마음은 많은 시간과 과정을 지나고 나서야 자리를 잡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혼자 씻는 방법을 배워갔다. 나의 엄마, 은숙이 머리를 감겨주고 몸에 비누칠을 해주던 편리하고 달콤한 시간은 인생에 아주 잠깐이었다. 혼자 샴푸를 헹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은숙은 곧잘 욕실 문을 열고 "깨끗이 헹구고 있지?" 하며 걱정을 했다. 아홉 살이 외로이 남아서 목욕하는 시간은 자주 무서웠다. 욕실 바닥 타일에 비친 드라이기를 보며 코가 너무 긴 피노키오를 연상하느라 겁을 먹기 일쑤였고, 서프라이즈에 나온 파란 귀신이 뒤에 서있을까 세수를 할 때도 한쪽 눈은 꼭 뜨고 있었다. 한 번은 너무 무서워서 은숙을 부르지도 못 하고 그릇에 딱 하나 남은 딸기처럼 가만히 욕조에 앉아 있느라 1시간이 흘렀다. 알아서 씻는 줄 알았던 은숙이 뒤늦게 들어와 온갖 상상으로 공포에 질린 나를 구해주었다.
머리는 항상 은숙이 말려주었다. 따뜻한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내 머리칼을 가르며 수분을 날리는 느낌은 아주 몽롱해서 자주 멍 때리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은숙은 내게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윙- 높낮이 없이 단조롭게 울리는 소음 밑으로 나는 작게 구구단을 외웠다. 제일 쉬운 5단을 두 번 반복하면 은숙은 기가 막히게 6단은 왜 안 하냐고 날카롭게 드라이기를 끊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육일은 육. 육이십이..." 그제야 다시 따뜻한 바람으로 내 머리를 꼼꼼히 말려주었다.
또 보름에 한 번 꼴로 은숙은 욕조에 물을 받아주고 내게 물놀이를 시켜주는 척하더니 때를 밀어줬는데, 나는 그 시간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두려워했다. 은숙이 들어와 안심이 되면서도 때 미는 일은 너무 아프고 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몸에는 매일 같이 친구들과 주차장에서 롤러브레이드를 타느라, 놀이터에서 고운 모레를 열심히 만드느라 많은 때가 쉽게 쉽게 쌓였다. 다 마치고 나면 은숙은 뿌듯한 표정으로 내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주며 "어때, 개운하지? 사람은 역시 때를 밀어야 해."라고 자주 일러주었다. 때 미는 것을 신봉하는 은숙이 개운 하다 하니까 개운한 가보다 했지, 사실 그 참 맛을 알기엔 나는 많이 어렸다. 그저 살살해달라고 당부를 했고 은숙은 안 아프게 하면서도 때가 잘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며 때밀이에 비누를 꼭 코딱지만큼 묻혔다. 묻은 게 보이지도 않아서 그냥 묻히는 척 시늉만 한 게 아닐까 그 비누 양이 늘 의심스럽고 불만이었다.
"어디 봐봐. 묻히나 마나 하는 양을 묻혀서 뭐 해. 좀 만 더 묻혀줘."
"아니야, 그럼 거품 나고 미끄러워져. 조용히 하고 앞에 봐."
피할 수 없는 주사를 기다릴 때와 같은 긴장 모드로 그렇게 은숙에게 등을 자주 내밀었다. 깨끗이 하는 시간이 귀찮고 무서워서 그래도 은숙이 가끔 때를 밀어주는 게 안심이 되고 편하기도 했다. 목욕이란 아주 귀찮지만 확실히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예능 프로에 빠져 일요일은 꼭 '공포의 쿵쿵따'를 챙겨 보았는데 그 날은 프로그램이 끝나도록 티비 앞을 쉽사리 떠나질 못 했다. 이어서 흘러나온 장나라의 신곡 '스윗 드림' 뮤직비디오 때문이었다. 제목처럼 달콤한 꿈같은 뮤직비디오는 나의 동그란 핑크색 안경 위를, 우스꽝스럽게도 렌즈가 하필 갈색인 안경 위를 천천히 홀로그램처럼 유영했다.(잘 나가는 애들은 은 테에 렌즈가 파랑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갈색을 해서 애들이 김건모냐고 놀리곤 했다.) 곧 나의 작은 숨이 멈추며 얼굴의 모든 기관이 동그랗게 확장되었다. 귀여운 파자마 세트를 입은 나라 언니는 알람이 울리면 자동으로 미끄러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동으로 양치질을 받고, 식빵을 들고 있으면 로봇이 총으로 딸기 잼을 쏴주는 세상에 있었다. 매일 같이 씻는 것을 예전처럼 누가 대신해주길 바랐던 아홉 살은 처음으로 시각화된 상상의 세계를 마주친 것이다. 그 이후 교내 과학 경진 대회에서 상상화를 그릴 때면 나는 한 큐에 씻겨주는 기계를 그렸다. 무지개 캡슐에 들어가면 장갑을 낀 손이 나와 전신을 씻겨주고 로션까지 발라주는 시스템이었다. 반 아이들은 교실 뒤 사물함 위에 걸린 멋지고 반짝이는 우주선 그림을 보며 감탄했고 내 그림 앞에선 짧은 탄식을 하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정말 필요한 데 현실에는 없는 물건이니까 미세한 좌절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게으름이 많아 실용적인 꿈을 꾸는, 깨끗이 하는 시간의 즐거움은 아직 잘 모르는 그런 어린이였다.
목욕을 해야만 하는, 어떠한 당위성으로 느끼던 아홉 살은 10대에 접어들며 조금씩 목욕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거품 목욕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동대문 두타 지하 1층에서는 여러 가지 수입 용품을 팔았고 은숙은 수박 향이 나는 거품 목욕제를 처음 사주었다. 은숙은 "수인이 이거 써볼까?" 하면서 플라스틱 우유 통 모양에 담긴 그 거품 목욕제를 내게 보였다. 그 물건을 팔던 아주머니는 뚜껑을 열어 내 코 밑에 갖다 대 향기를 맡게 해 주었다. 불량식품처럼 아주 달 것 같기만 한 진홍색의 목욕제는 정말이지 쨍한 수박 향기를 품고 있었다.
거품 목욕이란 참으로 신비로웠다. 물장구를 치면 거품이 높게 더 많이 일어나고 거품을 이불처럼 덮을 수도 있었다. 한바탕 놀고 나면 곧 엄마가 때를 밀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렴, 목욕이 기다려졌다. 어찌나 혼자서 소리를 꽥 꽥 지르며 신나게 거품 목욕을 했는지 윗 층에서 인터폰으로 나를 주의시켜달란 전화가 한 번 왔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용히 아기 주먹만 한 거품들을 일 열로 세워가며 혼자서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놀이를 했다.
목욕의 오락성을 알고 마음을 열었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아쉽게도 그 즐거움은 잊고 살게 되었다. 바쁘게 학원을 다니고 주말에도 미술 학원 특강을 듣고, 은숙이 등을 밀러 들어오는 게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스크럽을 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하곤 등을 밀러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했다. 씻는 일에 별다른 애정도 관심도 없었지만, 늦은 밤 갖는 혼자만의 시간은 고등학생인 내가 갈망하던 자유 그 자체였다. 추석 선물 세트로 들어온 샴푸와 바디워시들은 무심하게 욕실을 매 번 스쳐 지나갔다. 다만, 씻는 시간의 그 개운하고 시원한 맛은 온몸으로 알고 느끼게 되었다. 큰 모의고사를 망치거나 진로에 대해서 걱정이 될 때면 늘 무거워진 어깨에 아주 따뜻한 물줄기를 뿌렸다. 계속해서 물을 흘려보내며 내 우울함도 걱정도 조금 씻겨 내려간 듯했다. 외롭고 무섭다 느끼던 혼자만의 목욕시간은 온 데 간데없고 평화로웠다. 주황빛 욕실 등 아래 비치는 따스한 수증기는 흰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흘렀다. 자욱하고 포근한 욕실 안에서 맘 놓고 딴생각을 하고 가끔은 춤을 출 수 있는, 말다툼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걸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연기 하기에도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끗이 하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자 향기를 입은 먹음직스러운 비누와 갖은 목욕 용품들을 파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매장 사람들은 이 많은 것들을 욕실에 넉넉히 갖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매일 기분에 맞춰 다른 향기의 샤워젤, 샴푸, 로션을 사용한다고 했다. 나만의 향기를 씻을 때부터 레이어드 한단다. 입욕제의 종류는 어찌나 많고 이름이 길던지 나는 쉬는 시간에도 책자를 갖고 나가 달달 외웠다. 목욕에 이렇게나 조예가 깊은 세계가 있다니 전혀 생각해보지 못 한 세상이었다. 그저 일과라고 여기던 행위가 천사 같은 날개 옷을 입은 듯했다.
"매일 새롭고 특별한 향기로 샤워를 할 수 있다니!"
매니저님은 사용해보고 싶은 것을 샘플로 주겠다며 원하는 향기를 골라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레몬 향, 바다 향, 사과 향, 계피 향, 잔디 향 등 다양한 향기를 맡아보긴 처음이어서 특별히 맘에 드는 것을 고르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추석 선물 세트로 들어왔던 익숙한 향기의 희끄무레한 샤워젤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아주 예상이 안 되는 색깔들과 향기들로 온 몸이 짜릿해졌다. 취향을 갖기까지는 시행착오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나는 많은 것들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거의 다 사용해볼 수 있었다. 나는 일을 하는 동안 많이 사기도 했지만 많이 받기도 했다. 우리 집의 비밀 서랍장을 열면 입욕제와 샤워젤과 바디 비누가 넘쳐나는 데도, 나는 그저 욕심이 나 더 갖고 싶고 더 쟁여두고만 싶었다. 한정판이어서 귀하고 특별한 것들을 다양하게 사용해 보는 일이 진정으로 목욕을 즐기는 방법 같았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내자 점점 비밀 서랍장을 채우는 흥미도 옅어졌다. 정말 좋아하는 향기의 제품 몇 가지를 고수하는 것이 좋았다. 꼭 그런 제품이 있을 필요도 없다. 있으면 더 좋을 뿐. 일을 그만두고 비밀 서랍장에 쌓여 있던 비누들이 줄어들면서 본래의 서랍장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쯤 깨달은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태식과 나는 치앙마이에서 두 달을 지내다 왔는데 태식은 청결함이 정말 남다른 사람이었다. 세수를 할 때도 그냥 하지 않고 꼭 귓속까지 가득 거품을 넣으며 말 그대로 빡빡 씻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매주 수요일, 줄을 서서 불소로 입안을 소독하던 것처럼 아주 매운 가그린으로 꼭 입안을 소독하도록 내게 권고했다.
"수인아, 오늘 가그린 하는 날이지."
나는 이 말을 일주일에 한 번씩 들었다. 그러면 양치를 끝내고 바로 눈물이 고일만큼 매운 가그린으로 30초씩 입안을 헹구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매워 끈끈하고 길어진 침을 동시에 뱉으며 웃었다. 샤워기가 한 개이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느라 금방 몸이 추워지기도 했지만 그럴 땐 그냥 안고 있으면 되었다. 이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목욕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가진 취향이나 습관을 알게 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은 영원히 둘만 알고 싶은 즐거움이다.
서로 같은 향기를 묻히고 개운하게 잠에 드는 일. 미적지근하게 물기를 짜 낸 나의 머리칼을 태식이 웃으며 말려주었다. 나는 더 이상 구구단을 외우지 않아도 돼서 맘 놓고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Pierre Bonnard Nude in the Bath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