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상, <약수>
“태어나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앞당겼고, 죽어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후퇴시켰다고 말해도 될 존재”, “인류가 있은 이후 가장 슬픈 소설을 쓴 사람”
시인 김기림과 박용철의 이상에 관한 평가다. 그만큼 그는 우리 문학사가 낳은 불세출의 시인이요, 소설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상의 글은 매우 기괴하고 낯설다. 그 출현 이전 이후에도 그와 같은 글을 쓰는 문인은 없었다. 그러니 80여 년 전 그의 글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그의 글을 가리켜 ‘정신이상자의 잠꼬대’나 ‘어린아이의 유치한 말장난’으로 치부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그를 죽이겠다며 신문사에 항의한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오감도 작자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 하느냐. 열아문(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스물네 살 때까지 생활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23년간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이유이다. <슬픈 이야기>는 이에 대한 슬픔과 부모의 사랑, 가장으로서의 무능력함을 고백하고 있다.
“집을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왔더니, 여전히 가난하게 사실 뿐이었습니다. …… (중략)……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
사실 그가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운영한 것도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방은 경영난으로 인해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에도 인사동에 카페 <학>과 종로 1가에 다방 <69>를 개업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만큼 그는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상.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천재’다. 그러나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삶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을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고 했던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절망했고, 거울 속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성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일천구백삼십칠 년 정축 삼월 삼일 미시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맺고 문득 卒하다.”
이상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뭐라고 해도 탁월한 심리 묘사다. 그 중심에는 우울과 권태, 난해함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땅의 수많은 문인 가운데서 이상만큼 자신의 존재를 글 속에 각인해 넣은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그는 자의식이 강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의 생각과 의식,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상은 1929년 경성고공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건축이 아닌 문학과 미술이었다.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한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살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예리한 문학적 촉수와 세련된 문체는 기실 그의 장점이 아닌 아픔이자 고통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글에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기쁨과 행복, 즐거움보다는 역설과 위트, 독설과 비애, 권태가 가득하다.
1936년 7월 《중앙》 에 발표한 <약수>는 그의 무기력함과 가장으로서의 무능력함이 잘 드러난 글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던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약물은 안 먹어도 사람이 살겠거니와 술 안 먹고는 못 살겠다”라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아끼던 사람들은 그의 두주불사하는 모습을 걱정했다. 특히 그를 동생처럼 아끼던 시인 김기림, 정지용, 소설가 이태준 등은 그를 볼 때마다 “술을 자제하라”며 진심어린 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보다도 약주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몸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 (중략) …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얘, 이건 참 명이로구나”하고 3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 여자는 3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어도, 이 사람은 그저 세계에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모르고 그만둔 모양입니다.
게으르지 않으면 부지런히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게 또 마음에 안 맞았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병이 나서 신애(신열. 병으로 인하여 오르는 몸의 열)로 앓으면서 나더러 약물을 떠 오라기에 그것은 미신이라고 그랬더니 뾰로통하는(못마땅하여 얼굴에 성난 빛이 나타나 있는 모양) 것입니다.
아내가 가버린 것은 내가 약물을 안 길어주었대서 그런 것 같은데 또 내가 ‘약주’만 밤낮 먹으러 다니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하여간 나는 지금 세상이 시들해져서 그날그날이 짐짐한데(어떤 일이나 생활이 아무런 재미나 흥취가 없음) 술 따로 안주 따로 판다는 목로 조합의 결의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못 견디겠습니다.
누가 술만 끊으면 내 위해 주마고 그러지만, 세상에 약물은 안 먹어도 사람이 살겠거니와 술 안 먹고는 못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 이상, <약수> 중에서
※ 위 글에 나오는 이상의 <약수>는 다음 도서를 참조했습니다.
─ <이상의 문장/ 홍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