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서적을 보면 하나같이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랬구나."
를 생활화 하라는 육아서적의 지시대로 나는 한동안 그랬구나병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물론 진심으로 마음으로 그랬구나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하라니 그리 말했다.
자꾸만 나도 모르게 아이의 감정에, 말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갖다대기에
잊지 않기 위해 한동안 카톡의 상태메세지에는
'그랬구나' 라고 적어두기도 했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 울고불고 떼를 쓸때면 "아 그.랬.구.나 장난감이 갖고 싶.었.구.나."
아이가 밥먹기 싫다고 징징댈때면
"아 그.랬.구.나 밥먹기 싫.었.구.나."
아이가 끝이 없이 놀아주었는데도 놀자고 계속해서 떼를 쓸때면
"아 그.랬.구.나 더 놀고 싶.었.구.나."
를 마치 AI처럼 읊어대곤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속으로 이해는 커녕, 짜증이 치솟았지만
마음과 달리 입으로는 그.랬.구.나 를 말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사소통 중 80프로가 비언어적 소통이라고 한다.
언어로 그랬구나를 아무리 말하고 있어도
아이는 비언어적인 내 표정과 말투와 몸짓으로
진정한 수용과 공감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그랬구나는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았고,
아이의 짜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수년동안
나는 아이에게 공허한 공감을 보내고 있었다.
육아서적에서 강조하고 있으니까.
이거라도 안하면 안될것 같았다.
효과는 없었지만, 의무적으로 그랬구나를 말하고 있었다.
공감이 내겐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반대로 판단은 내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굉장히 빠른 반응이었다.
공감을 하기보단 사건의, 사람의 단면만 보고
빠르게 판단해 버리고 옳고 그름만을 변별하고 있었다.
교육분석을 받으며 수없이 지적받은 부분이었다.
인지적 사고로 인한 공감 부족.
인지적으로 옳고 그름만을 따지니 공감은 되지 않았다.
공감을 못하니 누군가의 잘못에 잘잘못만을 계속 따지고 들었고, 사건을 판단하고 사람을 판단하기에 바빴다.
잘못한 사람이 왜 공감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내게 상담사는 말하곤 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게중에는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도 존재하구요.
그런 살인자에게도 '정~말 죽이고 싶으셨겠습니다.' 라고 공감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며칠전, 남편과 오랜만에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나의 말에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감정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어머님께서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말씀하셨다.
매번 국가에서 해주는 일반건강검진을 받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남편 회사에서 지원되는 배우자 건강검진을 받고 있고, 일반검진과 다르게 매우 다양한 검사를 정밀하게 받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어머님께 남편은 갑자기
"회사에서 배우자가 받는 건강검진, 부모로 선택할 수 있게 바꼈어. 대신 배우자는 못받는거고"
라는 말을 마침 그 타이밍에 꺼냈고,
날더러 어머님께 건강검진을 양보하라는 말처럼 들려,
이전에 어떠한 상의도 없이 갑작스레 그 말을 꺼낸 것에 대해 화가 났다.
나 역시 당뇨에, 고지혈에, 갑상선에, 요단백에 어디 하나 성치 않은 몸이라
6개월마다 추적관찰을 받고 있고,
건강검진에 대해 절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기분이 상했음을 이후 자리에서 남편에게 말을 했고 남편은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고 답했다.
남편은 그런 의도가 없이 말했는데 이상하게 해석한 내 잘못이라며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했고,
반대 상황에서 시댁이 아니라 처가에서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내가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를 따지고 들었다.
나는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너무 좋으신 분들이니까.
하지만 시부모님이 좋은 것과 함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다.
시부모님의 건강이 염려되지만
내 건강을 양보하면서까지의 염려가 아니었다.
시부모님이 중요하지만 나 자신 역시 중요한 이 맘을,
남편이 이해하지 못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들자 화가 났다.
그저 나는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네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기분 나빴을 수는 있겠다." 라는 공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렇게 받아들인 나에 대해 잘못을 운운하는 남편에 화가 났다.
감정에는 정답이 없는데,
마치 내 감정이 잘못된 양, 그리 느끼는 내가 문제인양 말하고 있는 남편에 화가 났다.
본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으니 잘못이 전혀 없다. 라고 따지고 드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내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섭섭한 점을 이야기했고 그제야 남편도 네가 그리 느꼈을 수 있겠다며 미안하다 말을 해주었다.
문제가 해결되지도, 잘잘못이 가려지지도 않았음에도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고 행복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때 공감받지 못한 답답함,
그리고 공감 한마디에 상황이 달라짐을 경험하고서야 공감은 잘못을 하건, 잘못을 하지 않건 할 수 있는것임을 깨달았다.
감정은 잘못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은 의도적으로 느낀 감정도 아니고, 사건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는 정답이 없다.
감정으로 인해 어떠한 행동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행동에 대한 정답과 오답은 존재하지만,
감정 자체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는 얘기다.
감정 자체는 오답이 아니란 얘기다.
나를 하대하고 천대하고 무시하는 타인에게
죽이고 싶은 감정이 들었고,
그런 감정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에게
행동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지만
죽이고 싶다는 감정 자체는 공감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타인을 공격하고 싶은 욕구는
그것이 신체적이든, 언어적이든, 관계적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일어나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짜 행동으로 내비치는 사람과,
그러한 감정을 조절하여 조금 덜 위협적인 행동으로, 혹은 합법적인 행동으로 내비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행동에 대한 비난은 할 수 있어도, 감정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남편과의 싸움을 통해 공감의 참의미를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곤 한다.
타인에게 "저 사람 성격 참 이상해. 나랑 맞지 않아."
라고 느끼고는 금세 그 사람을 판단해 버리던 내가,
예전이었으면 이상하게 느껴졌을 성격의 사람도, 나랑 맞지 않다 느껴졌을 법한 사람도
이젠 다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지.
집단에서 혼자만 성격이 독특해 집단원들에게 거부감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게중 몇몇은 그 사람의 뒷담화를 즐기곤 했다.
뒷담화의 대부분은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쉽게 그 사람을 명명하고 프레임에 가두어 버리곤 했다.
그리고 뒷담화를 듣는 나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그러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환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 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저러한 행동을 했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오래 겪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설령 오래 겪어왔다 한들)
왜 그 사람에 함부로 문제적인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람을 프레임에 가두어 이야기 하는 거지?
누군가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 사람의 행동 중 일부는 이해가지 않는, 의아한 행동들이 있기도 하지만
뒷담화에 가담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을 쉬이 판단해버리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예전같았으면 신나게 뒷담화에 가담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람을 빠르게 판단내리고,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 해 나가면서
점차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음을,
모든 감정은 오답이 없음을 이해하고 나자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또 프레임을 씌우는 일에 조심스러워졌다.
또한 많은 타인의 감정들에 진심어린 공감을 경험하고 있다.
상대가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취할때에도
늘 알지 못함의 자세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겪어 내었을 그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을 것임을,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고려하고 또 절로 겸손해지게 된다.
물론 아직은 나 역시 미숙하기에
내가 공격받는 순간이면,
내 감정이 동요되는 순간이면,
판단을 보류하고 공감을 선행하기가
어려워질때도 있지만
이젠 왜 감정이 공감받아야 하고,
왜 사람에 대한 판단이 앞서면 안되는 것인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실수를 하더라도 금세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 같다.
모든 사람은(감정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