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너무나 연약한 부분이라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감추어두었던 내 감정이
크나큰 태풍에 크게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늘 인지를 사용해 감정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집단상담에서 감정을 타인들이 계속해서 건드려왔다.
인지는 역시나 철두철미하게
방패막을 가지고 나와 강인하게 튕겨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패에는 미세한 금이 갔나보다.
그 금 사이로 타인들의 공격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사실 공격이 아니었다. 그저 감정이 건드려진다는 것을 위협으로 자각한 나는 공격이라 명명해 버렸다. 심지어 나의 편을 들고 나를 공감하던 사람에게도 그 역시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칼차단 해버렸다. 나는 감정이 건드려지는 순간이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위협과 불안을 느끼나보다.)
그리고 미세했던 금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금은 결국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 균열 사이로 들어온 공격은
기저 깊숙이 숨어있는 감정을 깨운다.
이미지화하여 느껴진다.
방패막이 금이 가 그 사이로 태풍이 미세하게 들어오고 있었고,
그러한 미세한 태풍이 계속 자극이 되어
방패의 균열은 점점 심해지다 결국은 깨져 버렸다.
그리고 태풍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감정이 있는 곳까지 들어와 마구 휘몰아친다.
감정이라는 심장모양의 형태가
빠른 속도로, 강하게, 요란하게, 소란스럽게, 마구
흔들리고 있다.
다그닥다그닥다그닥다그닥 정신없는 소리를 내며.
그리고는 문득 불안해졌다.
어? 절대 건들여지면 안되는 곳인데?
얘는 내가 보호해야할 아이인데?
감정이 마구 흔들리고 있고,
심지어 나에 의한 흔들림도 아닌,
타인들에, 외부 자극에 의한 흔들림임에
통제권을 잃은듯 불안해졌다.
집단 상담 후 나는 지쳤다.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 심지어는 아팠다.
그저 쉬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잠들었지만
잠든지 세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절로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다시금 아직도 강하게 흔들리고 있는
심장모양의 내 감정이 또렷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그럼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내일도 상담이 있으니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눈을 감으면 귀신같아 보이는 어떠한 사람이,
얼굴을 보이지 않는 어떠한 두려운 존재가,
내게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는 도저히 불안감에, 두려움에
잠이 들 수 없어
새벽녁 잠에서 깨어난채 글을 쓰고 있다.
귀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허황된 망상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의 불안이 그러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귀신의 형태가 불안인건지,
아니면 감정인건지 명확하지는 않다.
마치 영화에서 보았듯
눈을 감으면 그 실체가
1초컷으로 둥.둥.둥 내게 가까워진다.
점점 다가오고 점점 커진다.
인지를 접어두고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감정을 꽁꽁 숨겨둬놓고는
감정이 보이지 않아 헤매인다.
어디 숨어 있니.
나와봐.
나와서 네 모습을 보여봐.
종종 감정이 올라오려는 순간이 있다.
울고 싶어질때.
그리고 무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쑤욱 내려가버리곤 한다.
감정이 표면으로 모습을 드러내려하니
인지가 순간 자리를 바꿔치기해서
빠르게 주인공으로 자리잡아 버린다.
예전 다중인격을 앓고 있는 사람이 쓴
빌리 밀리건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빌리의 머릿 속에는 어떠한 주인공이 서는 무대가 있고,
그 무대에는 조명이 비추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24개의 인격체가 돌아가며
무대에 자리를 잡고,
그 무대를 잡은 인격이 정신을 장악해 버린다고 했다.
어떤 인격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면,
다른 인격은 그 인격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상실이라고도 부르는 해리증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지와 감정에게서 다중인격과 비슷한 점을 느끼곤 했다.
나의 내면에 어떠한 무대가 존재하고
그 무대를 인지가 장악하고 있다.
감정이라는 아이가 무대에 서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감정이 표면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
위협을 감지한 인지는 빠르게
감정을 밀쳐버리고 그 무대위로 올라선다.
그럴때면 울컥하며 올라오려던 그 감정이 다시 쑤욱 내려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약간의 해리증상을 남겼다.
물론 기억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저 환상 속에 있다가 현실로 복귀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 몰입해
주인공과 함께 슬픔을 느끼다
현실을 직시하고는
금세 현실을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
감정이 올라오려다 물러난 그 자리는
냉정하고도 딱딱했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정이 올라오려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만
그 순간 내게 느껴졌던 그게 뭐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무엇이 잠시 나를 지나간거지?
그리고 인지가 무대를 장악한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차려지면서
마치 꿈에서 방금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자다 깨어 비몽사몽한 느낌이 아니라
번개에 맞은듯 정신이 번쩍 하고서는
곧바로 현실을 자각하고 직시하고 돌아보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을 차단하고 인지를 주로 사용하는 격리는 해리의 하위단계라는 얘기도 있다.
감정이 올라오려는 순간 난 분명 어떠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바로 인지가 치고 올라오자 금세 올라왔던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잊어 버렸다.
빌리 밀리건은 말했다.
24개의 인격체 중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인격체도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인격체가 위협을 느낄때면
다른 강인한 인격체 몇몇이 무대에 빠르게 모습을 나타내어 장악해 버린다고.
자신의 연약함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감정이라는 연약한 아이가 위협을 느낄때면
강인한 인지라는 아이가 빠르게 무대에 치고 올라온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강인한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서 나의 강한 모습만을 내비친다.
타인들은 내게 세고 강하고 단단해 보인다는 표현을 했다.
또한 냉정하고 차갑고 곁을 내어주지 않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감정이 누군가와 교류하려할때도
인지는 참견하곤 했다.
타인과 진짜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은 위협적이야.
내가 감정인척 해볼게.
인지로 무장된 나는
수용하는 척, 교류하는 척, 잘 지내는 척
해보지만 타인들은 느꼈다.
감정이 아니라 인지로 나를 상대하고 있구나.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알진 못해도
곁을 내어 주지 않음을,
너무나 견고해서 들어갈 틈이 없음을,
그리고 몇몇 이들은 내게서 거절받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곤 했다.
머리가 깨질듯 아파오다가도
글을 쓰고나면 어느정도 소화가 된다.
이 또한 인지적인 것일까.
난 이번에도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