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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un 29. 2022

여자 셋, 네팔 트레킹_2

독서모임에서 한라산 등산을

정유정 작가님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다 읽고 난 뒤 참석한 독서 모임에서 혼자 읽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책을 읽고 나서 그렇게 심장이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라 안나푸르나를 꼭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 독서모임 3인방 중 한 명인 K님도 나와 똑같이 정유정 작가님의 책들을 찾아 읽어보다 그 책을 읽었노라며 네팔 트레킹 가보는 게 자신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우리 같이 히말라야 가지 않을래요?”   

  

갑자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내가 놀랐다. 1년 반 정도 한 달에 한 번 만나 책 이야기만 나눈 사이일 뿐인데 같이 해외 트레킹이라니. 우리는 독서 모임이 본연의 목적이 아닌 친목 모임으로 변질될까 봐 그간 책 이야기 외에 본격적인 사(私)적 이야기는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독서 모임 3인방이 딱히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그래도 1년 반 이상 매달 만나 책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으니(독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치관, 취향 등을 저절로 알게 된다) 가깝지 않은 사이라고 할 수는 없는 좀 애매한 관계였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멤버 M이 우리가 네팔에 간다면 자기도 꼭 동참하고 싶다며 내가 방향 없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하여 독서 모임에서 모인 세 여인의 히말라야 원정대가 뚝딱 꾸려졌다. 2018년 12월의 일이었다.


얼떨결에 한 말에 히말라야 원정대까지 꾸리고 나니 평소 등산은커녕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 나의 저질 체력이 마음에 걸렸다. 정유정 작가님은 네팔 가기 전 집 인근 산에 올라 나름 연습을 많이 하셨던데, 최소한의 체력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뿐만 아니라 멤버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1년 동안 각자 트레킹을 할 체력을 만들어서 2019년 연말 즈음에 가는 것으로 대략적인 스케줄을 정했다. 나는 2019년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새 마음 새 뜻으로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직장 내에 피트니스 센터가 있어서 아침에 눈 뜨는 대로 눈곱만 떼어내고 달려가서 운동한 뒤 출근했다. 지금까지 올빼미로 살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려니 고되었지만, 저녁 시간에는 약속이 생기거나 야근을 하는 등 변수가 많아 안정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아침 시간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아이들 아침 식사와 등교 준비를 남편이 책임져 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1시간씩 운동하려니 꾸준히 할 수 있을지 스스로가 의심되었지만 ‘히말라야’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품고 하니까 몇 달 뒤엔 운동에 중독되다시피 하였다. 매일 러닝머신으로 3km를 뛰고 근력 운동을 했더니 부가적으로 살도 좀 빠지고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성인이 된 이후로 아니, 내 평생 이렇게 꾸준하게 열심히 운동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아침 운동으로 체력을 증진하고 있는 동안 10년 이상 아침 요가 경력의 멤버 K님은 매 주말마다 오름 등반을 다니고, 멤버 M은 다이어트로 무려 30kg 이상을 감량하며 각자 몸을 준비하였다. 각자 알아서 체력을 기르자고 했을 뿐인데 다들 '트레킹 할 때 내가 다른 멤버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독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불평불만을 대놓고 할 수 없는 약간 불편한 사이가 여행을 같이 가기에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절친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욱 열심히 체력을 기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기른 체력을 점검할 겸, 우리가 진짜 네팔로 트레킹을 갈 수 있을지 테스트를 해보자고 해서 우리들의 동네 뒷산(!)인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나로서는 대학 1학년 때 멋모르고 선배들 따라갔던 지리산 등산 이후 제대로 하는 등산은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2013년 12월 30일 제주 입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둘째를 출산하고 육아하고 일하느라 그동안 한라산 등산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쳐다보기만 했는데 입도 6년이 다 되어서야 처음 등산하러 가보는 한라산이기도 했다. 제주 출신인 멤버 두 명도 한라산 정상에 가본 지는 너무 오래되어서 다들 백록담까지 잘 다녀올 수 있을지 자신 없어했다. 여담이지만, 제주도민은 모두 한라산 정상에 가보았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정상까지 안 가본 사람이 더 많았다.


2019년 10월 27일 새벽 5시 30분, 성판악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잔뜩 쫄면서 시작한 등산은 새벽 여명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면서 어깨가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점점 빨라지는 페이스만큼 자신감이 쑥쑥 자라났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오전 10시, 백록담에 도착했다. 새벽엔 춥고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그날은 기가 막히게 날씨가 화창하고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드러난 백록담과 한라산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달리 표현할 길 없이 그냥 그림 그 자체였다. 조상님들이 덕을 쌓아주신 덕분인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백록담은 또 어찌나 감동적인지. 기념사진을 찍고 무사히 정상에 도착한 것을 서로 축하했다. 자신감 뿜뿜으로 성판악보다 훨씬 가파른 관음사 쪽으로 하산을 결정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날듯이 내려오는 길, 날머리에서 마침 현금 2만 원을 줍는 행운까지 겹쳤다. 하늘이 내려주신 돈이라며 더욱 신이 난 우리는 산행을 끝내고 관음사 탐방안내소 맞은편 식당에서 (주운 돈으로) 파전과 막걸리를 먹고 마시며 자축 파티를 벌였다. 한라산을 잘 오르지 못해 우리의 네팔 여행 계획이 파투 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막상 등산을 했더니 다들 너무나 가뿐하게 한라산에 올라 기분만큼은 이미 히말라야에 갔다 온 것 같았다. 체력은 이제 다 준비되었고 바야흐로 실행의 때가 무르익었다. 우리는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신나게 외쳤다.


"진짜 가자! 히말라야로."

2019. 10. 27. 독서모임 멤버들과 백록담에서. 히말라야 원정대를 꾸린 이후 독서모임 멤버가 늘어 4명이 한라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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