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by 풀빛

최근 중학교 시절부터 인생의 굴곡을 함께 공유해 온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여정을 잘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이다.


그 친구와 원가족과 단절한 이유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구의 반응에 새삼 아주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 너희 집에도 자주 놀러 가고

너에게 너의 가족에 관해 여러 이야기도 들어서 나도 너희 가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 가족의 '나르시시스트' 같은 특징과 그로 인한 나의 깊은 '외로움'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엄마 아빠의 싸움과 나의 불면에 관해서는 많이 이야기했지만.


유일하게 이런 문제를 공유했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내가 결혼을 한 이후에도 엄마는 나에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자주 요구했다.

특히 금전적인 지원을 요구하거나

아빠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해 달라는 것이 많았다.

남편과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남편은

나와 함께 발 벗고 나서서 엄마를 도았다.

돈, 시간, 마음, 몸을 갈아서

그들의 행복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었던 사람이 나와 나의 남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단절을 결심하고

함께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남편 외에 내가 마음을 열고 내 문제를 공유한 사람은 없구나.'


친구가 서운해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배신감도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친구의 반응을 보고 나는 그동안 나는 왜 친구에게

공유하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가족의 문제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직감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그걸 문제로 규정지을 내면의 힘이 전혀 없었고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로 귀결시켰다.

그게 편했다.

아마 내가 더 노력할 여지를 두었을 것이다.

내가 노력하면 내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줄거야

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갔다.

내 탓을 해야 내가 살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중년에 나이에 이르러서야

나는 '펑!'하고 누적된 압력에 의해 터져 버렸고

그제야 떠밀리듯이 원가족은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원가족의 문제를 막연히 느끼면서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스스로 내가 혼자임을 공인하는 것이고

나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단절 이후에도

원가족이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생살을 찢는 고통에 가까웠다.


친구에게 미안함 마음을 전하며

내가 아마 이런 마음 때문에 너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너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뒤이어 나는 그 친구가

아주 고마운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최근 나는 원가족과의 단절 동기와

내 깊은 외로움의 문제를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족이 평화롭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고등학교 친구들,

원가족과 단절 직전의 그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닌 직장에서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위로해 준 고마운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되었다.

몰랐는데, 정말 큰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할 거라고.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말하면

다시 상처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믿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내 주변에 있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말을 해준다.

"나는 네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오히려 얼마나 원가족과 연결이 간절한지가 느껴져."

"원가족에 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원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으로 받아들이려는 애씀이 느껴지고, 여전히 원가족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정말 네가 대단한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져. 참 잘 컸다.“

그런 진심 어린 지지와 응원이

내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단절 이후 남편에게 엄마가 했다는 그 말,

“내가 딸을 잘못 키워서 미안해”

“내가 지원금을 받으려면 호적을 정리해야 하는 거 같아.“

와 같은 말. 그리고

단절 이후 동생이 내게 보낸 신앙 서적 목록

(일탈한 영혼이여 읽고 정신 차리라는 의도)을 보낸 것.

끝까지 원가족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의 마음을 할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수동 공격 패턴을 보인다. 직접 면대면으로 문제의 본질을 마주 본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서로 무엇이 서운한지 서로 어떻게 조율해야하는지 논의할 의지를 전혀 갖지 않는다. 그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발언을 하며 공격하되, 뭔가 이상한 포장지로 감싸서 내민다)


그런데 지금 내 주변에 고마운 이들은

나에게 다른 말을 해주고 있다.

따뜻한 말. 내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것

같은 그런 말들 말이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줄 리 없다고

믿고 살아온 나였는데

세상은 그렇게,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위험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발짝만 잘못 디뎌도 나는 부서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렇게 되더라도 이젠 상관없어라고 마음을 먹고

솔직하게 말하는 행동하니

두렵기만 했던 것과는 다른 세상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원가족에게 매달리며 애정을 갈구할 때에는

정말 한 방울의 애정도 받을 수 없었고,

한 줄의 실오라기 같은

연결감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원가족을 놓으니 자연스럽게

나는 주변 사람들과 애정 어린 소통을 하며

연결감을 느낀다.

원가족에게 매어있을 때에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원가족을 놓으니

타인에 대한 적절한 신뢰가 가능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함께하면

독이 되는 관계는 분명 존재한다.

단절하지 않고 지냈다면

나는 여전히 아무도 믿지 못하고

우주에 혼자 떠다니는 외로움을 가지고

피눈물에 몸서리치며 평생을 보내다

어느 날 죽었을 것이다. 끔찍한 인생이다.


내가 봐도 이런 원가족 안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이렇게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정말 흔한 사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잘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한다.


친구들, 지금의 남편이자 과거 남자친구,

교회 선배들, 직장 동료들

그 사람들의 크고 작은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 지나갔지만 이제는 안다.


돈이 없는 나에게 고등학교 친구들은 늘

이렇다할 생색도 없이 떡볶이를 사줬다.

지금의 남편이자 과거의 남자친구는

내가 새벽에 집을 뛰쳐나오면

진심으로 옆에서 걱정해 주었다.

차비가 없는 나에게 엄마는 고열이 나도

과외를 하러 가라고 등떠밀었지만, 그 시절에

한 교회 언니는 차비하라고 돈을 주며

나에게 갚지 말고 했다.

너도 나중에 잘 돼서

어려운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원가족은 아무리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희생해도 나를 비난하고 공격했지만

나의 곁에는 늘 나를 아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셔서

쓰러지지 않고 잘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나는 믿는다.

그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에 기둥같은 것들이다.

그 기둥을 쓰다듬으며 나는 ‘감사‘를 생각한다.


가끔 나를 왜 이런 가족 안에 두셨는지.

신께 묻고 싶어진다.

우리 원가족이 왜 그런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너무 깊은 우울의 바다 아래로

또 내가 빠지는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이런 우울의 '왜'의 바다에

나를 빠뜨리지 않기로 했다.

명쾌한 답이 있을 리가 없는

질문은 나를 질퍽하고 축축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가족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연결되고 싶었던

간절한 욕구가 있었고

그 바람은 좌절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외의 영역은

내가 생각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너무 깊이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라는 질문 대신에

나를 살린 말들을 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더 표현하고

나도 미약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 출발한 행동이다.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 나처럼 가족 안에서 너무 외롭고 아픈 사람은

내 이야기가 너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가족을 떠나도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줄 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내가 죽음처럼 살지 않고 사는 것처럼 살 수 있게 해 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당신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데 잘 살기를 바란다고

응원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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