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치려 한다.
(짦은 글들은 계속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지만.)
어지러운 마음을 가누며 바로 걷고자,
그리고 문제를 직시하기를 두려워하는 '나'를 재촉하여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하고자 글을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는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내 작은 끄적임이 힘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나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가지는 '선'의 중요성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가 불분명했다.
타인의 짜증이나 불편함 슬픔까지도 다 내 것처럼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주 버거웠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능력이 높은 수준을 넘어
쓰나미처럼 그 감정이 나를 덮치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원가족의 나르시시스트적 측면과 나의 HSP적 측면은 매우 부정적 의미에서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던져 그들의 부정적 감정들을 책임지려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죄책감을 자극할 수록 더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나의 행동의 매커니즘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나는 이제 그런 삶을 살지 않기로 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를 명확히 하고
나의 감정, 요구, 몸에 좀 더 집중하고자 한다.
'이기주의의 시대'에서 '공감 능력'을 재고하는 일이 시대의 화두처럼 떠오르는 지금
나는 오히려 거꾸로 살아야 내면의 건강함을 찾을 수 있다.
자동적 공감, '나'라는 주체가 상실된 공감,
타인의 감정을 나의 감정으로 온전히 치환하는 공감을 벗어날 것이다.
천부적 기질은 바뀌기 어렵기 때문에 쉽게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순간적으로 몰입이 되기 쉽겠지만,
그럴 때 나는 스스로 '잠깐 멈추자.'라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려 한다.
'저것은 저 사람의 감정이지 나의 감정이 아니야.'
'저 감정의 주인은 저 사람이고 저 사람이 다뤄가야 해. 나는 그 감정을 다룰 의무가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조금씩 이러한 '선'과 '경계'를 설정하는 걸음마 단계의 연습을 실행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전보다 타인에 관한 불안함이 더 줄어든 것을 경험하고 있다.
상처받을 까봐, 내가 무너질 까봐 두려움에 떨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지고 나의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르시시스트인 원가족은 내가 나를 '잘못된 인간'으로 바라보길 바랐지만,
나는 이제 정면으로 그들의 바람을 거부한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들로 나를 채워나가려고 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단절'이라는 선택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수 없이 받으며 살아가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선택을 인정하는가이다.
나는 나의 선택을 스스로 존중하고 인정한다.
이 글을 시작할 때는 그러려고 몸부림치느라 정말 피투성이었었는데
지금은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제법 새살이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는 참 큰 힘이 있다.
신께서 나에게 준 단 한 번의 소중한 삶이 과연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살아온 날 만큼 살아갈 날이 있다면 다행이고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다.
나는 정말 한 해 한 해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
나의 지난 고단한 삶이
나와 타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거창한 사명을 위한 삶이었다고 부풀리고 싶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영웅담의 흔한 전개요소처럼 개인의 삶의 고통을 미화하려는 시도가 매우 싫다. 아픈건 그냥 아픈거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그 자체로 바라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의미 부여의 교묘한 폭력성이 싫다.)
다만 앞으로 남은 삶만큼은
‘나'를 잃지 않고 살고 싶다. 그 뿐이다.
망망한 바다와 그 위의 별을 가만히 바라보고
위선없이 치열하게 쓴 문장들을 곱씹어 읽고
초록빛 나무 사이를 걷는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가벼운 농담을 나눈다면,
이 삶은 그래도 참 괜찮을 것 같다.
소박하고 가벼운 추억들로
반짝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