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족과 분리를 스스로 결심한 이후
나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원가족이 너무 버거웠지만
내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원가족내에서 나의 역할로 채웠었다.
원가족과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못했다.
가족이 곧 나이고 내가 곧 가족인
그렇게 어지럽게 엉키고 엉켜있는 덩어리가 나였다.
나의 내면에서 원가족을 분리하여 떼어내니
나는 껍데기만 남은 듯 했다.
'대체 나는 누구지?'
사춘기 시절에 할 법한 질문을 한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엄마가 말했던 ‘나‘는 정말 ’나’였을까.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나의 특성에 항상 부정적 꼬리표를 붙였고
나는 엄마의 생각을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수용하고 나의 특성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원가족과 단절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정체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기존의 정체성은 붕괴했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새로운 대답을 해야 한다.
내사화된 엄마의 목소리에 반박하며 대답을 시작한다.
엄마가 늘 나를 비난할 때 한 그 말
“넌 왜 그렇게 예민해?” 라는 그 말.
우리 엄마는 나의 예민함을 항상 문제삼았다.
(사실 엄마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는 '예민한 기질'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 관해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나의 예민한 특성을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다.
원가족과 단절한 이후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예민함을 주제로 심리학 도서를 탐독했다.
나는 내가 HSP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 매우 민감한 사람)는
인구의 약 15~20%가 지니는 신경계 특성으로,
감각처리 민감성(Sensory Processing Sensitivity, SPS)을 기반으로
외부 자극에 대해 깊고 섬세하게 반응하며 정서적 공감 능력이 뛰어난 성격 유형이다.
이들은 소리, 빛, 냄새, 사람의 분위기 같은 자극에 쉽게 과부하를 느끼고,
뇌의 감정 처리 및 공감 관련 영역(예: 전측 대상회, 편도체, 거울 뉴런 시스템)의 활동이
활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엘레인 아론 박사는 HSP의 특성을 D.O.E.S. 모델
(깊은 정보 처리, 과자극 민감성, 정서 반응성 및 공감, 미묘한 자극 감지)로 설명한다.
HSP는 부정적인 환경에서는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환경에서는 창의성, 직관력, 공감력 등으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호텔이나 펜션에서 자야할 때 잠을 잘 못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낯선 공간의 위화감도 그랬지만 특히 청각적 자극은
나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냉장고 코드를, 시계 뒤편의 건전지를 뽑아야 잠 들 수 있었다.
손에 감각도 민감해서 손에 조금만 뭐가 묻은 느낌이 나면 바로 씻거나 닦아야 한다.
불편한 신발을 신지 못해서 구두를 신고 외출했다가 슬리퍼를 산 적이 많다.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가 너무 불편해서 휴대폰은 늘 무음모드로 해 놓고 지낸다.
음식 중에 물크덩하는 식감은 입안에 닿는 느낌이 불편해서 먹지 않는다.
그래서 회를 먹지 못한다.
나도 사람들과 회를 같이 먹고 싶어 노력을 해보기도 했는데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다.
크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후각에 민감도가 아주 높았던 사춘기 시기에는
회집에 앉아 있으면 냄새 때문에 구토감이 느껴져 견디기 어려웠다.
응급실에 가면 내가 아픈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한꺼번에 너무 많이 동시에 나에게 쏟아져 들어와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보도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당연히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못한다. 잔인한 장면이 많은 영상물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아저씨'나 '더 글로리'와 같이 우울한 성장기를 보내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는
보다가 멈췄다가 한달 정도 있다가
다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기도 한다. 보다가 마음이 너무 힘들어져서.
이렇다 보니 엄마는 나의 '예민함'의 특성을
문제시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게 나의 타고난 기질이고
이 기질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부모라면 마땅히 나의 타고난 기질을 인정하고
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안내했어야 했다.
공격 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나르시시스트이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도 이제는 안다.
어쨌든 나는 엄마의 비난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심리적 대응의 힘이 없었다가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내가 HSP였기 때문에
원가족 안에서의 여러 문제를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이 느끼고
더 많이 아파했을 수도 있다.
가끔은 내가 HSP가 아니었다면 덜 아팠을 수도 있었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렇다고 엄마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질이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타고난 특성 자체는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고유한 특징일 뿐이다.
오히려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를 해결했고, 조율했고, 이해하려 했다.
그 덕을 가장 많이 보려한 것도 엄마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예민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지만
예민하기 때문에 단절 이후 회복도 어느 정도 해나가고 있다.
무너진채 살아가지 않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상담사도 나의 회복탄력성을 놀라워했다. 많은 상담을 해보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의
회복은 보기 드물다고. 사실 상담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고 매일 울기만해서 (오열 수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민함의 힘'이라는 책에는 이러한 구절이 등장한다.
플루에스는 예민함이 주는 이점을 검증하기 위해 청소년 대상 우울증 예방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이 프로그램은 4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청소년들에게 우울증 증상을 인식하고 회복할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측정하기 위해 프로그램 실시 전과, 중간, 끝난 후에 우울증을 평가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예민성 테스트에 따른 점수를 고려하기 전까지는 청소년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예민하지 않은 청소년들은 프로그램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반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는 프로그램이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예민한 아이들은 똑같이 좋은 보살핌을 받는 덜 예민한 아이들보다 더 나은 사회성을 키우고 더 나은 성적을 얻으며 심지어 이타적인 행동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중략) 성인이 되면 예민한 사람들은 덜 예민한 사람들 보다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이 더 높을 수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결과와는 정반대이다. 이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오히려 한 방울의 영양분도 높치지 않고 사랑스러운 꽃들로 가득 찰 때 까지 계속해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다육 식물과 유사하다. '예민함의 힘, 젠 그랜만, 안드레 솔로' 79-81쪽
상담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내 모습은 놀랍도록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HSP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어떠한 상황에도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지지 않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 가지는 강점도 존재한다.
HSP(매우 민감한 사람)의 강점은 깊은 사고력과 통찰력, 뛰어난 공감 능력,
섬세한 감각과 미적 감수성,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
예리한 직관력을 꼽을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관계에서 세심한 배려를 보이고, 예술적 감수성과 창의적 사고,
도덕적 기준이 높아 인간 중심의 분야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호나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여 조율자나 중재자로서 탁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나의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고자 한다.
이런 마음을 먹으니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
나는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자연 풍경을 보는 것을
아주아주 좋아한다.
HSP이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예술 작품이 가진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는 나의 이런 행동들이 다 '회피'같기만 했다.
현실은 어지럽고, 어두운데 '아름다운 것'에
깊이 몰두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 들었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고 그저 헤매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런 것들이 주는 깊은 위로가 너무 좋으면서도
동시에 잘못된 행동 같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단절을 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내가 좋아하는 것에 깊이 빠질때
'이제야 숨쉬는 것 같아. 산소호흡기를 단 느낌이야'라는 생각보다는
일상적인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다.
(처음에는 이 느낌이 너무 낯설어서 뭔가 내가 고장난 것 같았다.)
편안함이 낯설어서 나는 어색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이 편안함을 받아들였다.
그냥 '그래,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럽고, 조용하고, 편안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여전히 깊이 몰입하고 거기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마치 천국에서 잠시 빌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나는 이런 느낌을 갖는 나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냥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민감도가 높아 쉽게 고갈난 영혼을 잘 채워가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예민함은 문제가 아니다.
내 안의 보물이다.
나는 보물 찾기를 하고 있다.
내 안에 있지만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보물들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내 마음 속 숲을 헤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