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모른 척했던 엄마를 가끔 만난다결혼식장 엄마의 빈자리,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날, 아이의 첫걸음마, 엄마라고 나를 부르던 날
한국에 다녀온 이후면 엄마가 더욱 그립다. 전화를 걸어 잘 도착했노라며 목소리 듣고 싶고, 손주의 재롱을 들려주며 낄낄 깔깔 수다를 떨고 가끔은 엄마의 넋두리도 들어주는 딸이고 싶다.
잔디를 처음 만난날
생각해 보면엄마는내 인생에 단 한마디 개입도 조언도 한 적이 없다. 성적으로 야단을 치거나 공부하라는 말도,그 흔한 학원 한번 다닌 적도없는완전한방목으로자랐다. 사는 게 녹록지 않았을 테고 별난 아빠와 딸 셋을 키워내며 둘째인 나를 신경 썼을까 싶다가도 보상받지 못한 본인의 여자로서의 삶을 딸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더욱 자유롭게 키워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엔 마라토너로 대학교 때엔 지리산 종주녀로 회사 야유회에선 릴레이 주자로 등산 동호회에선 날다람쥐로 불리며
서른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조차 않는 골칫거리였을 텐데도걱정하며 고작 한엄마의 말은" 니는 해외에 살팔자란다'걱정하지마라!였다.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 난 지금 런던에서 아이를 기르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엄마, 내가 마라토너를 낳았어!
영국에서 얼마 동안 살지 몰랐기에 지내는동안은아이에게 자연에서 잔디를 마음껏 밟게 해주고 싶었다. 영국에서의 첫 집은 창문을 통해서 보는파크갤러리 같았고,소담스러운장미 정원이 멋진곳이었다. 그곳에 살며 런더너처럼 살고 싶어 졌다
우리 그냥 런던 살자!
해외 출장자 마음대로 일정을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영국 떠나기 1개월 전쯤으로 기억한다. 남편에게 어느 날 "영국 회사를 알아보면 안 돼?" 하고 던진 한마디가 지금 영국에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늘도 넓은 공원을 달리는아이 보며 어린 시절 마라토너였던 나를 본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정말 방목하며 키워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