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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지키기

나를 지키기

by 누런콩

쉬는 날엔 아침 7시에 눈을 뜬다. 오후 1시에 출근하는 날에도 웬만하면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려고 한다. 새벽에 출근하거나 밤샘 근무로 아침에 퇴근하는 날에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나의 일상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려고 애쓴다. 내가 하는 것들이 어쩌면 사소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8시간은 자기, 일어나면 이불 개기,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 방안을 정돈된 상태로 만들기 등등. 나의 루틴은 ‘갓생’ 살기와는 조금 다르다. 나는 매일 밤 같은 약을 먹는다. 빼먹지 않으려고 다이어리에도 쓴다. 아주 소량이지만 복용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3개월마다 한 번은 약을 타러 병원에 간다. 10분도 채 안 걸리는 진료를 받으러 그 먼 길을 가려고 할 때마다 아득해진다. 그래도 가야지, 나를 일으키는 건 지금의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한때는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게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감정은 널을 뛰는 듯했다. 멀쩡하다가도 한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음의 상태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났다. 며칠 밤을 새운 적도 있었고 오한에 바들바들 떤 적도 있었다. 공기의 무게마저 느껴지는 듯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다. 돈벌이를 못 하면 어떡하지, 어디서도 날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못 살겠는데 어떻게 자꾸만 살라는 거지,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겠다. 생각은 비대해져서 나를 깔아뭉갰다. 무언가를 해 볼 기력이 아예 없었다. 에너지 제로(나 되면 다행인) 상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해 줬던 좋은 말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따뜻한 격려와 위로도 받았을 테지만 나는 어쩌다 한 번 듣는 모진 말만 남겨두고 다 튕겨내 버렸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얻은 병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의사와 협의 없이 단약을 시도했다가 큰일 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오랫동안 약 먹는 것이 거북했다. 내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게 어딘가 하자가 있다는 말과 같았다. 미친년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몇 년 전엔 신점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점집에 찾아갔다. 신 엄마라는 사람이 내 어깨와 허리 이곳저곳을 눌러봤다. 아파서 악 소리가 나왔다. 그는 내 몸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했다. 약을 끊고 상태가 이상해지면 언제든 찾아오랬는데 찾아가진 않았다. 어느 날엔 내게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 사람에게 이끌려 대순진리교 법당(?) 같은 델 갔다. 교감이라는 자가 내게 무당 될 팔자는 아니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뭐 다른 게 있다는 거 같은데 마저 듣진 않았다.) 차라리 그런 게 나았다. 현대의학이 정의할 수 없는 뭐, 그런 거.


어쩌다가 ‘병밍아웃’의 부담이 덜어졌는지 모르겠다. 비평 수업에서 한 번 써봤더니 괜찮았다. 내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게 커다란 불행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니크해서 오히려 좋아.) 정신병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것도 꽤 여러 권.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약을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인 것 같다. 이제는 진료를 받을 때 나의 상태를 최대한 상세하게 말하려고 한다. 넋두리같은 건 접어두고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별일 아닌 것에 크게 화가 나진 않았는지 같은 것들을 말하려고 한다. 지난달엔 상담을 받고 싶다고도 말했다.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내게 “스트레스 받는 거 있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답했다. “그럼 받을 필요 없어요, 싼 건 효과도 없어요”라고 해서 진료실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건강을 자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지다. 상태가 안 좋으면 병원에 가야 한다. 최소한 상담이라도 받아서 내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나 어디가 아픈 것 같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진단은 한 번에 내려주지도 않는다. 병명으로 낙인찍힐 걱정은 잠시 거두어들여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아픈 나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나를 지켜내는 일이다. 아픈 걸 치료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생존의 문제다. 오늘도 나는 산다. 이렇게 소란하게도 고요하게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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