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내 기분이 20~80 사이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크게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건 내 예민한 기질을 더 키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분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리스페리돈을 시작으로 수많은 약을 처방 받았다. 정신과 약이 나의 일부를 죽인다고 생각했다. 졸로푸트 같은 걸 복용할 때까지만 해도 반감이 심했다. 의사가 나를 뭘로 아는 건가,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약을 잘 먹지 않았다. 진료일이 다가오면 미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억지로 떠밀려 병원에 갔다. 의사가 하는 물음엔 최대한 짧게 답했다. 별일 없어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시작하는 법이라곤 없었다.
언제부터 치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리는 것 같다. 그즈음부터 약을 성실하게 먹으려고 노력해 왔으니 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의사 말대로 나의 기분은 20~80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법이 없었다. 나는 많이 누그러들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죽일 듯이 욕하고 저주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몇 번 말하고 치워버렸다. 마음은 무뎌진 만큼 튼튼해졌다. 둔해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훨씬 가뿐해졌다. 일상을 유지하기엔 아무래도 약을 먹는 게 나았다.
아직도 예전의 과민하고 까칠한 나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아마 회사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큰 탈 없이 버티진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날을 세우고 꼬투리를 잡았을 것이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아무 데서나 싸우려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엔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다. 국내를 다니는 비행기가 잠잠하다 싶으면 국제선에서 뭐가 터진다. 여객기도 화물기도 아프지 않고 다닌다 싶으면 꼭 어디 날씨가 안 좋아진다거나 관제에서 뜬금없이 출발을 안 시킨다거나 한다. 번개는 또 어찌나 자주 맞는지. 긴장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생긴다. 자잘하게라도.
며칠 전엔 6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항공기에서 연락이 왔다. 스포일러(Spoiler)가 안 좋아서 연료가 부족할 것 같다고 했다. 스포일러는 날개 위에 붙은 판을 말하는 것인데 순항 중에 세워져 있으면 항력이 증가해 연료를 잡아먹을 수 있다. 드물게 아는 게 나왔다. 한동안 비슷한 메시지가 하도 많이 떠서 자료를 정리해 놓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이 또 시끌시끌해졌다. 우리는 스포일러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게 먼저라는 의견이었다. 잘 접혀있으면 실제 연료 소모량은 계획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기술적인 측면이라 우리가 다 설명하기는 애매했다. 공은 안전운항팀으로 넘겼다. 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기내에 있는 운항 승무원에겐 팀장에게 연락해 보라고 했다. 근무가 끝날 때까지 그 비행기는 목적지를 향해 잘 날아가고 있었고 연료는 200파운드밖에 더 쓰고 있지 않았다.
그날 오후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니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통제실에서 있었던 9시간의 들뜸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아서였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엔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뭐라도 좀 먹으면 잠이 올까 싶었다. 야식을 먹어볼까. 정수기 위에 수면유도제가 보였다. 약의 도움을 받기는 차마 께름칙했다. 그렇게라도 잠드는 게 나을지 고민하면서 정수기 앞을 서성였다. 다시 누웠다. 12시를 넘기고 잠은 그냥 포기했다. 대충 눈만 감고 있다가 보니 해가 떴다.
도파민에 중독된 것 같다. 의학용어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 붕 뜬 상태를 즐기게 된 것 같다. 너무 조용하면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그 시간에 딴짓이라도 하면 그만이지만 네이버를 보는 것도 잠깐이다. 클릭 몇 번에 지겨워진다. 나는 내성적이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라 통제센터와는 맞지 않는다고 늘 말하고 다닌다. 지금 먹는 약이 아니었다면 이미 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통제 사무실로 발령받은 지 4년이 넘어간다. 뭐, 4년인지 5년인지도 모르겠다. 우당탕탕 어찌저찌 넘겼다. 이제는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아니면 어딘가 모르게 심심해진다. 나도 이제 통제 사람 다 됐나 보다.
오늘도 산다. 참으로 큰 일 없이 이렇게 잘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