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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두려워했다

by 누런콩

합병 이슈가 한창이던 시절, 회사에 구조조정 소문이 돌았다. 같은 계열의 회사가 우리 회사를 인수할 테니 중복되는 인력을 다 흡수할 순 없을 것이라고들 했다. 그럴듯한 전망이었다. 큰 회사로 가게 될 판이라 잘됐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엄청난 퍼포먼스를 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를 끌고 가줄까? 영어 점수도 낮고 대리 진급에서도 한 번 물먹은 나를? 생각은 자꾸만 안 좋은 방향으로 치우쳤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밥을 먹다 말고, 사무실에서 잠깐 수다를 떨다 말고 사람들은 앞으로의 자리를 보존하기 어려워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실제로 회사가 팔려나갔을 때 일부 사업부는 우리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회사에 분리 매각되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였다. 다들 어디 구멍가게로 끌려가게 되는 거 아니냐면서 벌벌 떨었다.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나는 ‘그래 어딜 가든 나만 열심히 하면 됐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물론 매번 실패했지만 말이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정신질환을 얻었다. 마지막 대학 시험을 보던 날 나는 길거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한참을 통곡했다. 시청역 부근에서 길을 잃었다. 겨우 찾아간 경찰서까지 친구가 나를 데리러 나왔다. 그때 나는 내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내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학기는 교양수업으로 채웠는데, 제대로 된 답안지를 한 장도 작성하지 못했다. 수업 자료로 소개된 역사책은 모르는 단어투성이였다. 삼 일 내내 단 한 페이지도 읽어내지 못했다. 전공 수업을 듣는 3년 동안엔 꽤 괜찮은 성적을 받아냈던 나였다. 내 전부였던 학교가 나를 멍청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러웠다. 화도 났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뭘 할 수나 있을까? 학교 바깥의 세계는 그려본 적이 없었다. 졸업하면 당연하게 대학원을 갈 생각이었다. 학부생 신분으로 연구실에 있는 동안 ‘대학원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에 밥벌이는 해야 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험이 내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 후로도 2년 동안 나는 자주 오한에 떨었다.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보면서,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하는 거 아니냐는 커뮤니티 글을 보면서, 아이패드로 필리버스터를 켜놓고 잠도 안 자고 따라 들으면서. 그때 내가 느꼈던 건 모종의 공포심이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도 몰랐다. 내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거나 내가 느끼는 바를 천천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말 그대로 ‘덜덜 떠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에 나는 정신과로 끌려갔다. 리스페리돈을 시작으로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약을 처방받았다. 한 번 먹기 시작한 약은 쉽게 끊을 수 없었다. 마음대로 단약할 때마다 큰 고초를 겪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진단명은 아직 모른다. 내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을 땐 의사더러 내게 도대체 무슨 병이 있는 건지 말해보라고 박박 우겼다. 의사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며 대답하기를 미뤘다. 이제는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나는 3교대 근무자다. 근무의 형태는 오전, 오후 그리고 밤을 생짜로 새는 야간 근무가 있다.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사무실에 인력이 넉넉한 편도 아니라서 밤샘은 어쩔 수 없다. 이전 사무실에 있을 때 회사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의사의 허락 없이 약 먹기를 중단한 지 6개월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여자를 따라갔는데 사이비 종교인 것 같았다. 자꾸 내게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신경이 곤두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3일을 잠 한숨 안 자고 버텼다. 그러고선 출근해 헛소리를 주절거리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 나를 세브란스로 데려간 게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회사에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당장에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는 일근 직으로 빠질 순 없으니 야간 근무에서만이라도 배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떼준 진단서 하나 제출했을 뿐인데 나는 내 모든 이력이 까발려졌다고 생각했다. 두려웠다.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어서 약을 빠짐없이 먹으려고 노력했다. 고기능 정신질환자로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다. 의사도 이제 약은 평생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지금 먹는 약은 손톱의 반 알 만큼도 안 된다. 병원에서는 매일 먹어도 몸에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일이라서 쉽게 말하나 의심스럽지만) 이것저것 먹어보다가 드디어 나에게 맞는 약을 찾은 것 같다. 사무실도 옮겼다. 지금 있는 곳으로 발령 나고 나선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비정상 상황이 발생하면 지난 부서보다 훨씬 바빠지는 곳이다. 업무에 적응하고는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걱정이 된다. 언제까지 회사가 나를 받아줄까? 내 이력을 아는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내칠 수 있지 않을까? 회사 밖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뭐지? 회사가 위태위태해 질 때마다 구조조정 이야기가 돈다. 나는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속앓이를 한다. 나에게는 지금이 코로나 때보다 불안하다. 아무리 고용 유지가 합병 조건이었다고 한들 쉬이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아픈 몸을 가진 나도 남들과 똑같이 부려질 수 있다. 그걸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시간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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