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식 예산은 200만 원이었다. 그것도 1년 동안 나온 팀 비 남은 걸 끌어모아 겨우 채운 액수였다. 예상 인원은 50명, 인당 4만 원씩 할당이었다. 대관을 하기엔 돈도, 인원도 모자랐다. 나는 이번에 장소 섭외를 맡았다. 상사들은 팀에서 막내인 내가 젊은 취향을 반영하여 쌈박한 곳을 알아봐 주길 기대했나 보다. 내심이라기엔 "고깃집 말고 어디 좋은 데 없을까?" 내뱉었으니 속마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은근한 압박을 받으며 메뉴 몇 개를 골랐다. 뷔페, 오징어 보쌈, 중식집…….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았다. "저희 50명 정도 될 것 같은데 대관 가능할까요?" 음식점마다 다르긴 했지만, 장소를 통으로 빌리는 건 가용한 금액을 훨씬 상회했다. 물어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어림도 없었다. 겨우 합의를 본 건 오징어 보쌈집이었다. 음식점을 통째로 빌리거나 가벽을 세우는 건 불가능해서 테이블 여러 개를 붙이기로 했다. 단체 예약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여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우리 사무실에도 인력이 많이 없다. 주중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사람이 잡무까지 다 하기엔 벅차서 스케줄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을 덜어준다. 이번에 나는 팀 내 행사나 제반 환경 개선을 담당하는 업무를 서브 잡(subjob)으로 받았다. 말만 다르지 '오락부장'이나 다를 바 없는 그 일을 다들 하고 싶지 않아 해서 막내인 내가 떠맡다시피 했다. 이번 회식에도 담당자는 따로 있었지만 명색이 오락부장인 내가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장소라도 알아보라는 게 상부의 지령이었다. 비록 회식이 있는 날 나는 10시까지 서는 근무에 배정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날 근무를 바꾸지 말았어야 했다. 어느 날 여행 뽐뿌가 왔다. 마침 같이 일하던 선배가 근무를 바꿔준다고 했다. 회식날 나는 오후 근무에서 휴무로 바뀔 참이었다. 쉬는 날임에도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찜찜했지만 선배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다녀와"라고 하는 통에 눈을 질끈 감고 근무 변경 결재를 올렸다. 관리자들은 내가 회식에 오려고 근무를 바꾼 줄 알았나 보다. (아니, 상. 식. 적. 으.로.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무슨 회식에 미친 애도 아니고?) 다들 내게 "이번 회식 기대가 커"라며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지만 나는 어리둥절했다. 회식 대신 여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나를 둘러싼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앞만 보고 일했는데도 뒤에서 다 날 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욕은 안 해서 다행이네……' 싶었지만 "회사 생활 참 뭐같이 한다"라는 말도 했단다. 그깟 술자리 한 번 안 간다고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하나.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담당자에게도 압박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회식에 진행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단다. (진행자라니, 이런 시대에 웬 말인가?) 선물 증정도(게임 있어야 함), 경사 있는 팀원 1분 스피치(자리에서 일어나 한두 마디씩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단다. 내가 회식에 못 가니 다른 선배한테 진행을 부탁했는데 윗사람들의 요구사항이 늘어날수록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되었다. 차라리 대놓고 여행을 취소하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욕 한 번 질펀하게 하고 잡아놓은 숙소를 다 취소했다면(어차피 다 무료 취소 조건) 그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여행을 미루라는 말은 하지 않고 회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냐고 내게 물었다. 그까짓 여행, 다음에 가도 될 것이었지만 오기가 나서 바득바득 놀러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티브이에서 요즘 MZ 세대는 회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더라도 점심시간 1시간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백 번, 천 번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젊꼰'(젊은 꼰대의 줄임말)이라고 불리는 데도 이번 회식은 너무했다. 회식, 아무리 좋게 쳐봐야 그냥 술자리일 뿐이다. 게다가 상사들이 모두 오는 불편한 자리에 돈푼이나 쥐여주고 오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다 무슨 횡포란 말인가. '회식 또한 회사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발상은 젊은 세대의 회식 기피 감정을 심화할 수밖에 없다. 즐겁게 술 한잔하면서 회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보자는 게 회식의 본래 취지여야 한다. 우리 그냥 밥 먹자,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