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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차 운항관리사 일태기 극복기

by 누런콩

영국 YMS 비자는 만 35세까지 신청할 수 있다. 신청 기간은 따로 없다. 365일 언제든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하여 몇 가지 질문들에 답변하고 돈을 내면 된다. 비자비와 2년 치 건보료를 합치면 약 370만 원 정도. 이어지는 결핵 검사와 서류 심사까지 통과하면 비자는 발급된다. 이걸 어떻게 아냐고? 며칠 전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이 비자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직장인 369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고들 한다. 차례대로 3년, 6년, 9년차가 될 때마다 퇴사 욕구가 차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법칙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9년차다. 거짓말 단 한 모금도 보태지 않고 사직서 제출 직전까지 갔다. 일이 힘든 것도 그렇다고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이유 모를 피로감이었다. 의욕이 단 한 스푼도 없었다. 이 회사에 속해 있다가는 내 미래까지 망치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조금의 열정도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 버텨내다가는 회사 밖에서의 내가 아무런 경쟁력도, 쓸모도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사고의 흐름은 극단으로 갔다. 조금이라도 일찍 여기서 벗어나야지.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거기에 내 모든 걸 쏟아부어야지. 지금도 늦었어. 생각의 끝은 퇴사였다. 하루라도 빨리 사직서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상태였다. 그즈음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나는 분위기에 조금도 섞이지 못했다. 농담을 건네도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집에 갈 때가 되어서야 선배를 붙잡고 퇴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동안은 퇴사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급기야 후배건 선배건 보는 사람마다 나를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나불대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어릴 땐 직장에서 몇십 년을 쉼 없이 보낸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은 일상에 반복되는 나날들. 신입사원이던 시절 나는 선배들에게 “하루에 8시간씩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안 힘드세요?”라는 질문을 해대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미쳤다. 9년차 직장인이 된 내게 누군가 내가 했던 그대로 물어온다면 나는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겠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라고 쏘아붙일 것 같다. 컨디션이 매우 안 좋은 날이라면 “넌 뭐 다를 거 같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진 말 못하겠다.) 새삼 직장에서 20년, 30년을 일하신 분들이 존경스러워진다. 그 긴 시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기 일을 해낸다는 건 놀라우면서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아직 그만한 깜냥이 없어서 늘 ‘직장엔 왜 안식년이라는 게 없을까? 무급이라도 쉴 수만 있다면 단 한달만이라도 쉬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YMS 비자는 충동적으로 신청했다. 나이 제한이 만으로 35세이니 아직 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내가 아직 ‘청년’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걸 깨닫자 묘하게 기분이 나아졌다. 동기들에게 내 꿈은 아직도 아일랜드로 넘어가 감자를 캐는 거라고 했던 그날, 그 밤에 침대에 누워 나는 홀린 듯이 영국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며칠이 지나 결핵 검사까지 받고 났더니 갑자기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그래, 내가 어디 가서 이만한 돈을 받을 수 있겠어. 남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고들 하지만 혼자 살기엔 충분하지. 뭐가 됐든 새로 시작하면 월급도 그만큼 줄어들 텐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나 있겠냐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되뇌었다. 답은 그냥 다니던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었다. 정 다른 걸 하고 싶으면 자투리 시간에 힘을 쏟아 보더라도 일단은 밥벌이를 포기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 그 밥벌이.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결론이었다.


지금은 영국에 낸 2년 치 건보료가 환급되지 않아 조급해하는 중이다. 행정이 이렇게 느린 나라에서 어떻게 터를 잡겠다고 했던 것인지……. 언젠가 나는 다시 바깥엔 더 큰 가능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이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자리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땐 진짜로 사표라는 걸 제출할 기회가 올지도. 직장에서의 권태기가 찾아온다면 그간 통장에 입금됐던 내역을 보자. 내가 따박따박 들어오는 이 월급 없이도 살아낼 수 있을 사람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밖에서도 이만한 돈을 일정한 주기로 쟁취해 낼 자신이 있다면 언제든 퇴사든 뭐든 상관없다. 안타깝게도 아직 나에겐 그만한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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