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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기 위해서

by 누런콩

오늘도 아빌리파이 10mg을 먹는다. 야간 근무에 들어가기 전엔 약 먹는 걸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매일 할 일을 적어놓는 다이어리에 ‘출근 적 약 먹기’라고 표시해 둔다. 내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고선 일을 마쳤다는 의미로 회색 형광펜 줄을 긋는다. 나는 3교대 근무자다. 오전, 오후, 야간 근무를 한다. 이제는 자기 전 약 먹는 것을 거의 습관화하였지만 밤샘 근무를 하기 전엔 자주 놓치고 만다. 약의 효용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약을 먹는 한 내게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또다시 정신을 놓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새끼손톱보다도 훨씬 작은 약 반 알을 규칙적으로 복용한다.


나는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최대한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내 마음을 되짚어본다. 30분 동안 마구잡이로 생각나는 것을 적어 내려가면서 나의 현재 상태를 점검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컵을 마신다. 여유가 된다면 책을 읽고 회사에 가야 한다면 나갈 채비를 한다. 규칙적으로 먹고 일찍 자려고 노력한다. 수면 시간은 적어도 8시간 확보하려고 한다. 잠은 내게 중요하다. 처음 증상이 발현됐을 때나 그다음 번에도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후였다. 내가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오늘이 무너졌을 때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병명은 기타 정신증이라고 한다. 사실 내 병명이 ‘기타 정신증’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의사에게 물어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 병증이 나타났을 땐 내게 진짜로 병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 병명은 무엇인지 캐내려고 했다. 나는 의사에게 내 병명을 제대로 말해달라고 악을 썼다. 의사는 처음에 조현병으로 의심된다고 했다가 그 병은 아니랬다가 병명을 아직 확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진단을 내리길 미뤘다. 어느 순간엔 내 병명 알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 회사에 서류를 제출하려고 보니 내가 기타 정신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조금 허무했다. 겨우 이런 걸 알아내려고 그간 그렇게 에너지를 소모했나 싶었다. 의사와 더는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는 정신증인가 보다’하고 살고 있다.


오랫동안 병을 부인해 왔다. 단지 스트레스로 인한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고,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우겨 왔다. 정작 설득하지 못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정상인’이고 싶었다. ‘멘탈이 약한’ 사람이 되는 건 끔찍이도 싫었다. 그런데 벌어진 일을 지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주저앉았고, 울었고, 횡설수설 말을 쏟아냈다. 보이지 않는 것들로 벌벌 떨기도 했다.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이제야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는 정신질환 수기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이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구나 조금씩은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신질환 당사자가 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폭이 넓어진다. 세상이 단순히 정신병자의 행위라고 치부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약한 멘탈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고 해도 괜찮다. 나를 지탱하는 수단은 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약이 지금의 나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엄청난 도움을 받긴 하겠지만,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나의 수없는 노력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멀쩡히 회사에 다닌다. 조직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감당할 수 있는 몸이 됐다. 집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너끈히 견딘다. 가족들에게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수시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미쳐도 잘 살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오늘을 살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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