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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선 썬 Sep 26. 2022

<아빠 특집> 딸 바보 아빠

엄마와 페미니즘하기(6)

아빠와 함꼐한 유치원 특별 수업


아빠와 함께하는 특별 수업

 하루에 유치원을 두 번 간 적이 있다. 아침에 한 번, 저녁 먹고 다시 한 번. ‘아빠와 함께하는 날’ 행사였다. 아빠들이 퇴근 후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와 수업을 듣는 것으로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단 하루 있는 날이었다. 엄마가 챙겨준 저녁을 먹고 아빠와 함께 저녁 길을 걸어 유치원으로 갔다. 유치원에서는 아이와 아빠들이 조를 이루어 과학 실험을 했다. 용액을 관찰하고 관찰 내용을 쓰는 활동이었다. 공대를 나온 엔지니어 아빠에겐 쉬운 활동이었다. 나는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보다 훨씬 잘한다며 속으로 뿌듯해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의문은 아빠와 함께하는 특별 수업을 왜 저녁에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육아하는 아빠의 모습이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아빠들. 그런 아빠들의 퇴근 시간 이후에 유치원에서 특별 수업을 연 것이다. 엄마들이 유치원에 오는 것은 특별한 수업도 행사도 아니었지만 아빠들이 오는 것은 축제 같은 저녁이었다. 아빠와 함께 유치원에 간 그날은 지금도 내게 아주 특별한 날이지만, 우리 자매는 자주 낮이고 밤이고 아빠와 많은 곳을 다녔다. 

 엄마 아빠의 교육 방침은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연년생 자매인 우리가 동물이 나오는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주말에 동물원에 데려갔다. 동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책에서 본 내용을 다시 말해주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부산시립박물관이며 복천박물관, 성지곡수원지, 금강공원, 용두산공원 등등 많이도 다녔다. 딸들이 많은 것을 접하고 스스로 느끼며 성장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책 말고 동물 만나기

 언어학을 전공한 나의 반전 과거라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한글을 배웠다. 엄마 아빠는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입학 전까지 내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내가 집에 있는 커다란 표준국어대사전을 책장에서 꺼내어 뒤적이는 것을 보고 한글도 모르는 내게 사전 찾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사전 찾는 법을 먼저 익힌 나는 초등학교에서 교과과정으로 사전 찾는 법을 배울 때 제법 주목을 받았더랬다. 

 책장에 있는 그림책과 동화책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는 나를 도서관에 데려가 책을 찾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지금이야 도서청구기호를 검색하고 책을 직접 찾을 수 있는 개방형 서가이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도서목록카드를 찾아 사서에게 제출하면 사서가 책을 찾아서 주는 폐쇄형 서가의 도서관이 대부분이었다. 아빠는 폐쇄형 서가에서 책을 찾고 빌리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그 후로 그 방법으로는 책을 빌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2급 사서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도서목록카드를 조금은 익숙하게 써낼 수 있었다.

 엄마 아빠와 나와 동생 넷이서 많이 다니기도 했지만 아빠와 우리 자매 셋이서만 다닌 적이 많다. 집에는 몸이 편찮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기에 아빠는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주말 육아를 담당하다시피 했다. 부산에서 자란 어린이라면 다 기억할 부산교대 미끄럼틀도 어린이날에 아빠와 함께 타러 갔었다.      


태어나보니 종갓집 종손의 첫째 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인 아빠가 태어났을 때 앵두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다. 그때 심은 앵두나무는 아빠와 함께 자라 아빠의 나이만큼 살았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동생이 태어났을 때 자신의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꺾꽂이를 하여 앵두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나와 내 동생도 각자의 나이만큼 함께 자란 앵두나무가 있다. 봄이면 흰 꽃이 피고 초여름에는 새빨간 열매가 열린다. 새콤달콤한 앵두를 따다 간식으로도 먹고 술도 담그고 꼭 조금씩은 까치밥으로 놔둔다. 성인이 된 두 딸은 앵두주가 빠알갛게 익으면 엄마 아빠와 함께 마신다. 

 나와 내 동생은 앵두나무로 집안의 대를 잇고 있지만 어린 여자아이들이 집안의 종손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몸이 약했던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낳을 때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겼다. 동생을 임신했을 때 아빠는 집안에 공포했다고 한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엄마의 건강을 위한 결정이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둘째가 딸이라는 것을 엄마 아빠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왕왕 성별을 감별하여 여아낙태를 하던 때였기에. 뱃속에서부터 엄마 ‘껌딱지’였던 동생은 엄마와 그리도 떨어지기 싫었는지 난산으로 힘들게 세상에 나왔다. 

 아빠는 태어나면서부터 종갓집 종손이라는 이유로 가부장제의 규범 속에서 살아왔고 그 규범을 지켜왔지만 동시에 딸들을 위해 가부장제의 규율을 깨고 싶어 했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자식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아빠는 내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왜 없다고 하시냐며 맞받아쳤다. 그렇게 우리는 제사와 차례를 지낼 때 아빠 바로 뒤에 섰다. 작은 할아버지들도 오촌 당숙들도 나와 동생 뒤에 서셨다. 종손인 우리가 집안 서열에서 더 높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동생이 함께했다. 꼭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중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빠표 '고무 다라이' 수영장

  

 가진 아빠의 마음

 어느 날 퇴근한다던 아빠가 너무 늦어서 연락을 해보니 경찰서에 있다는 것이다! 통화를 길게 하기 어려우니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엄마와 나와 동생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아빠가 오면 같이 먹으려 한 저녁 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술을 한 잔 하고서 늦은 퇴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고 도와달라고 소리쳤고 아빠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달려가 가해자를 온 힘으로 붙잡고 버스기사에게 가까운 경찰서에 내려달라고 말했단다. 버스기사가 경찰서로 가지 않고 그대로 버스정류장에서 뒷문을 열어버려 가해자가 내리려 하자 20대 젊은 남성이 가세하여 가해자를 함께 붙잡았다고. 버스에서 내려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가 상황을 설명하자 버스 이동 중에 있었던 일이라 지역이 달라져서 관할 경찰서로 가야 한다고 하여 다른 경찰서를 이동해 다시 진술을 했단다. 피해 여성은 나와 내 동생 또래로 보였다고 했다. 진술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여성분이 아빠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고 아빠는 미안하다고 답했다.      


“저도 딸 둘 키우는 아빠로서, 좀 더 살아본 어른으로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빠는 내 딸들이 저런 일을 겪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피해 여성분이 도와달라고 소리치는데 그 만원 버스에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실로 이야기를 들은 나와 동생은 그 여성분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라면 그렇게 도와달라고 소리도 못 질렀을 거야 하는 이야기를 했고 아빠에게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연신 칭찬을 했다. 

 며칠이 지나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피해자가 아빠에게 사례를 하고 싶다고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극구 거절했다. 끝내 피해자 분은 경찰을 통해 감사하다는 장문의 문자와 함께 가족들 드시라고 케이크 기프티콘을 전해주셨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니. 아빠가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그 대답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고, 우리는 또 그 아들의 딸들이지.

 아빠는 딸 가진 아빠로서 근심걱정이 많다. 미투가 이어질 때 그들이 2차 가해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을 더 하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도 속상해했다. 한국 문화가 여자들에게 이상하게 강요하는 게 너무 많다며 딸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있다. 생리통이 심할 때는 약을 빨리 먹을 것! 한국에선 생리통이 아무리 심해도 참아야 한다는 인식이 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의사의 글을 근거로 들어가며 생리통으로 아프면 약을 꼭 먹어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생리통이 심해도 원래 이런 거지 하며, 약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하니까 끙끙 앓기만 했었다. 아빠가 하도 약을 먹으라고 하니 마지못해 진통제를 먹었고 나는 생리통이 나을 수 있는 병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첫 생리를 했을 때 아빠와 단 둘이서 태종대에 놀러갔다. 오륙도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해산물을 먹으며 아빠는 나의 초경을 축하해줬다. 힘들고 아프겠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이제는 네 인생을 네가 더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는 아빠다운 덕담과 함께.      


딸 바보 아빠의 진화

 가끔 아빠가 없는 자리에서 엄마와 우리 자매는 ‘아빠는 딸 바보가 아니라 딸 등신 아닐까?’ 하는 말을 한다. 딸 바보라고 하기엔 좀 더…… 진화형이라고 해두자. 포켓몬만 진화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 차도 없던 시절 부산이며 김해까지 이곳저곳 딸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아빠는 절대 아기띠를 메지 않았다고 한다. 딸 둘을 엎고 안고 다니더라도 아기띠만은 하지 않았다고. 엄마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아기띠를 메지 않는 것이 아빠의 남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했단다.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 몇 해 전, 홍구리를 넣어 다닐 이동장을 살 때 아빠가 가방 형태의 이동장을 살펴보더니 꽃무늬 분홍색 가방을 골라와 본인이 메고 다닌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메는 가방에다가 구리한테 안 어울리는 분홍색이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구리한테 이 가방이 제일 편할 것 같다고 했고 결국 그걸로 샀다. 아빠는 정말로 구리를 가방에 넣고 끈을 어깨와 허리에 둘러메고 잘 다니고 있다. 엄마는 큰딸, 작은딸 아기 때도 아기띠 안 메던 사람이 구리는 막내딸이라고 가방 메고 다닌다며 기가 찬다고 했다. 딸들이 컸다고 딸 바보는 끝나지 않는다…… 다만 나이 든 딸 바보가 되어 갈 뿐이다. 

 아빠는 ‘경상도 아버지’라고 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 무뚝뚝하고 엄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서? 비단 경상도만일까? 아빠는 한국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비껴나 있다.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남자/아빠가 하는 일과 여성/엄마가 하는 일이 우리 집에선 다르게 나타난다. 진정 딸 바보 아빠는 딸을 늑대 같은 남자로부터 지키려드는, 딸을 자신의 소유로 느끼는 남성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을 느끼고 그것을 딸과 함께 없애나가는 남성이다. 그래서 우리 아빠는 딸들을 대신하여 싸워주지 않는다. 딸들과 함께 싸워준다.      

아기띠 안 하던 시절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3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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