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파리바게트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빵을 아침식사로 준비하던 중이었다. 막 일어나 식탁으로 와 앉은 두 아이, 그리고 남편의 눈이 분주한 나를 쫓고 있었다. 막 내린 커피 서버의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려는데 남편이 서두르는 내가 불안해 보였는지 “조심해~”라고 한마디 했다. 순간 나는 “조심은 무슨. 맨날 하는 걸.”이라며 곧바로 받아쳤다. 매일같이 내가 하는 일인데 뭘 조심하라는 것인지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답이 나오자 남편은 그다음 말은 잇지 않았다. 그런데 짧은 정적을 깨고 남편 대신 첫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응, 알았어하면 될 텐데요.”
“어?”
평소라면 주로 내 편을 들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거나 했을 텐데 예상치 못한 첫째의 말에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아빠가 엄마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요. 그냥 응, 알았어. 조심할게라고 말하면 좋을 거 같아요”
아이는 행여 내 기분이 상할까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 어... 엄마는 아빠가 괜한 말을 해서 그렇지.... 근데 그러게... 네 말이 맞네. 그러네.”
변명 비슷하게 말이 나오려고 하길래 아이 앞에서 그러고 싶진 않아 바로 인정했다. 맞는 말이었다. 남편이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을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여 서로의 기분을 상할 말을 내뱉었다. 남편에게는 ‘내가 예민해서 그랬으니 이해해~’라며 억지를 부릴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흔한 주말의 아침식사를 했다. 나는 아이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이의 말이 그렇게 심각한 내용도 아니었고, 흔한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부모와 자식 간이 아닌 인간 대 인간, 여자 대 여자의 동등한 관계로 충고를 들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엄마, 나 이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래전에도 이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엄마의 입장이지만, 그때는 내가 딸의 입장이었다는 것이 다르다. 내가 육사에서 막 1학년 정신없는 생도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였다. 엄마, 아빠는 나의 하루가 무척이나 바쁘다는 걸 알고 계셔서 목소리 듣겠다고 먼저 전화하지 않으셨다. 나 또한 내가 너무 자주 전화해도 두 분이 불안해하시는 걸 알았기에 많아야 1주일에 한번 연락드렸다. 그런데 그 날은 태권도 수업 후 달리기까지 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내 삐삐에 집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불안해진 나는 바로 집으로 전화했다.
“여보세요, 엄마. 저예요.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무슨 일은 무슨~” 불안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묻는 나와는 달리 조용한 엄마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난 또 삐삐에 번호까지 남겨 놓으셨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놀랬잖아요.”
“... 무슨 일은 아니고, 이번 휴가 때 집에 오면 네 동생이랑 아빠랑 얘기 좀 해 보라고. 내년이면 고3이라 많이 예민한데 니 아빠는 그냥 매번 못 넘어가서 맨날 둘이 부딪힌다. 아무래도 네가 얘기하면 나을까 싶어서. 난 백날 얘기해도 소용이 없네.”
“그거야 휴가 가서 얘기해도 되는 건데 뭘 전화까지 해서. 알았어요. 가서 얘기해 볼게요.”
그렇게 싱거운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끓었다.
그런데 이 싱거운 대화는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내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을 한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의 품 속에서 무난하게 자랐고, 20살이 되어 급하게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만 생각했다. 그때까지 이미 법적으로 어른, 즉 성인이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날은 처음 내가 자식이 아닌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 어른으로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단지 엄마가 정식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관계가 지어진 이는 엄마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간이라는 종속적인 혈연관계이면서 나아가 나에게 처음 여성으로 연대의식을 느끼게 해 준 관계이기도 하다. 자라면서 엄마에게 큰 소리로 혼난 건 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만큼 몇 번 되지 않는다. 내가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였기 보다는 엄마가 기다려주는 엄마였다. 격한 칭찬도 하지 않으셨지만 감정적인 비난도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내가 선택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믿어 주셨다. 그 시절 나는 그런 엄마에게 받는 신뢰에 비해 너무나도 비루했고, 그래서나 자신을 보기가 싫었던 때였다. 바로 그 적절한 때에 엄마와의 통화는 또 한 번의 버팀목이자 묵직한 지지가 되었다. 정작 엄마는 그런 줄 모르고 하신 것이었겠지만.
서로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높이 보아주고 걱정은 하되 불신하지 않는 것이 가족이라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겐 운이 좋게도 엄마 같은 여동생까지 있어서 이렇게 나를 지지해주는 여성이 항상 둘 이상이었다. 이제는 그 엄마의 딸이 다시 두 딸을 낳아 엄마가 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육아와 일에 치여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지적만 하던 나는 첫째의 그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맑아졌다. 공기가 탁해지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순간은 멍했지만 마지막엔 공기가 상쾌해진 느낌. 내 아이가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나만해졌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내 딸들에게 엄마 노릇 말고도 든든한 지지자이자 조력자가 되어 주라고말이다.
내가 엄마에게 받은 최초의 지지는 나에게서 내 아이에게로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지지가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도 사방으로 뻗어 나가길 바란다. 우리가 단순히 여성으로서의 연대가 어느 순간 짠하고 생기길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뿌리가 있는 지지에서 오는 힘이야말로 쉽게 힘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나는 이젠 아이들에게 뿌리 위 밑동이 되어야 할 차례이다. 나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과 내가 응원하는 모든 이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내가 살아야 할 명분이 확실히 생겼다. 밑동 없이 어찌 가지가 뻗어 나가겠는가. 이 긍정적이고 궁극적인 이유야 말로 내가 속한 이 세상의 공기를 바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