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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Oct 20. 2021

마흔이 넘어 깨달았다. 죄책감은 내 것이 아니라고.

1990년의 봄이었다. 언니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가방을 책상 아래 처박아 던져두고는, 책상에 엎어져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보다 5살이 많은 중 2 여학생이 학교에서 돌아와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의 이유는 내 생각으론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친구랑 싸웠거나 시험을 망쳤거나. 그런데 한참을 울던 언니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옆에 와 강아지처럼 앉아있는 날 바라보며 하는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 임신한 거 같아. 어떻게 하지?"
 
내게 그 어이없는, 어마어마한 말을 던져놓고 언니는 또 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엄마가 방으로 후다닥 들어와 우는 언니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 무슨 소리냐고 닦달을 했다. 내가 보기엔 엄마도 쓰러지기 직전 같아 보였다.
 
"나 생리하는 중인데 버스에서 어떤 아저씨가 내 옆에 앉았어. 친구들이 그랬단 말이야. 생리할 때 남자 옆에 앉으면 임신한다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10살. 지금 아이들이면 얼핏 알 수도 있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성교육이란 시간이 없었고 이후로 8년이 지난 18살이 되어서야 나는 교실에서 그나마 성교육 다운 성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날, 언니는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서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고 이후로는 생리를 하더라도 걱정 없이 학교엘 다닐 수가 있었다.
 
그런 시대였다. 성에 눈을 빨리 뜬 아이들은 포르노 비디오테이프와 성인 잡지를 숨기며 보았고 여자아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임신을 하는지도 모르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부모 누구도 아이들에게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여자가 창피한 줄 알아야지!"


모두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시절의 잘려나간 단면은 무지했고, 사회는 성 순진무구한 아이들만 착하게 기억했다. 자신이 임신을 했을지 모른다며 우는 딸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임신한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라고 눈을 치켜떴던 엄마는 왜 그랬을까. 엄마는 성에 대한 지식이 우리보다도 전혀 없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시대. 그 시대의 딸로 태어난 엄마 또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았을 리 없었다. 그런 엄마가 자신이 가진 무지와 수치심을 자식에게 물려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수치심과 죄책감은 언니 다음으로 나에게도 전해졌다. 마는 언니와 나에게 늘 여자가 지켜야 할 것들과 여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수치심을 가르쳤다. 성인이 되었지만 이성을 사귀고 관계를 가질 때도 난 죄책감을 가졌다. 내가 깨끗하지 않은 듯했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고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사랑 그 자체를 느끼고 행복하면 되는데, 내 안엔 물려받은 수치심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여자가 되다. 시댁과 친정, 남편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여자라는 인생에 눈을 뜨게 했다. 여자에게 강요되는 인내와 희생이 존재했지만 세상은 가장이란 남자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자가 가져야 할 감정이 수치심만은 아니라는 걸, 내 인생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아이를 키우며 매일이 꽃피는 엄마라는 행복과 깨달음.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이 우리의 인생에 존재했다.


스마트폰과 sns라는 우주가 탄생하는 것도 지켜보게 된 세대다. 다행히 현재 내가 살아가는 사회는 구닥다리 성적 수치심을 가르치는 사회는 아님이 분명하다. 여전히 많은 불합리함과 불공정이 존재하면서도 다행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많은 통로도 가지고 있다.(지금 내가 쓰고 있는 브런치를 비롯하여)


나의 딸에게 마흔을 넘긴 여자로서 나는 하고 가르친다. 여자가 가져야 할 수치심은 법과 공중도덕, 그리고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인간 공통의 것이어야 한다고. 스스로 성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인간이자 여성으로 부디 훨훨 날아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 수치심은 내 것이 아니었음을. 마흔이 넘은 우리의 세대는 드디어 물려받은 수치심단절키는 세대가 되었다. 나는 우리의 마흔이 그래서 자랑스럽다.



사진/ 영화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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