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사랑은 떠난다.

by 김선비

어찌어찌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또 다른 ‘너’를 만났고, 좋아하게 되었다. 너도 내가 좋다고 해서 연애를 시작했다.


운명이라고 느꼈다. 이전까지의 연애는 모두 소개팅으로 시작했다. 나는 학교나 직장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호감을 표현해서 그녀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 본 경험이 없었다. 물론 소개팅도 서로의 호감이 전제되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소개팅은 일상에서의 만남과는 좀 다르다. 소개팅은 사귀냐, 안 사귀냐의 선택지 밖에 없다. 그러니 꼭 100점일 필요가 없다. 커트라인만 넘으면 된다. 꼭 이 사람을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당장 만날 사람이 없다면, 당분간도 없을 것 같다면, 혹은 있더라도 지금 이 사람보다 별로라면 사귀면 된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으면 시작한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다르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받아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내가 만날 수 있는 그나마 나은 상대가 아니라 그냥 순전히 내 마음이 가는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했다. 특별히 너의 마음을 얻기 위한 유혹의 기술(물론 그런 게 있지도 않지만)을 쓰지도 않았고, 평소 하던 대로 어리숙하고 찌질하게 행동했는데 그런 내 모습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느꼈다. 닮은 점은 과장했고, 다른 점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하지만 서로 안 맞는 점을 발견하더라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맞춰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너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서로에 대해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부족할 연애 초반,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구마구 쏟아냈다. 내가 얼마나 생각이 깊고 똑똑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인지, 이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은 얼마나 속물적이고 멍청한지,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현실적인 조언을 하려고 하면 나에 대한 비난인 양 방어적으로 받아들였다. 운명이(라고 내 멋대로 단정지어버렸으)니까 너는 내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어 달 뒤 헤어졌다. 전화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횡설수설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 나는 다시는 너를 만나지도, 너에게 연락이 닿지도 못했다.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진작에 알았다. 무미건조한 말투, 지루해보이는 표정, 나날이 늦어지는 답장. 그런 것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 내가 뭘 하면 (애초에 한 순간이라도 나를 사랑했던 건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될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듣지 못했다. 어쩌면 너도 몰랐을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듯, 사랑하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내겐 그 답이 필요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야 그걸 고칠 수 있고, 그래야 다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답을 말해주지 않으니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나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수밖에. 나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다보면, 아예 다시 태어나 버린다면 그중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끝없는 자기부정의 늪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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