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타다 보면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벽에 가로막혀서 앞으로 갈 수 없고, 뒤로 빼자니 다른 범퍼카가 있어서 뺄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범퍼카를 빼보려 혼자 낑낑대지만 시간만 흘러갈 뿐 아무 소용 없다. 결국 그냥 내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렇게 혼자 궁상을 떨고 있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너는 내 곁에 없다. 내가 너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여자들이랑 어울려서 신나게 놀았는지 네가 알 길이 없다. 내 인생에 다시 등장할 확률이 0%에 가까운 사람을 생각하느라 귀한 청춘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따위로 살아서는 나중에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오더라도 잘 될 턱이 없다. 나도 자신감이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 같은 걸 보여줬던 순간들이 가끔이나마 있었다. 그 순간 보여주었던 긍정적인 에너지에 너도 잠깐이나마 이끌렸던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의 나에게선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부정하면서 나는 너무 음침하고 쓸 데 없이 진지하고 무거운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런 남자가 자기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고 감동받을 여자는 없다. 오히려 소름끼친다며 도망쳐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나가 놀아야 한다. 술집에서 헌팅을 하건, 길거리에서 번호를 따건, 친목 동호회에 들어가건 어떻게 해서든 여자와의 접점을 늘려야 한다. 가볍고, 발랄하고, 부담 없는, 이 사람이 입을 열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인싸가 되어야 한다.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너 때문에 못쓰게 된 나라고
바보처럼 너를 기억할 핑계를 찾고 있어
아직도 나는 이별도 못하고 살아
- 김범수 [슬픔활용법]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내가 그 동안 쓸 데 없는 바보짓을 해왔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너와의 관계에서 나는 철저히 매력 없는 남자였다. 관계를 리드하는 능숙함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오히려 내가 힘들다며 징징대기 바빴다.
그럼에도 내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하나라도 있다면, 너를 너무 많이 좋아했다는 것이다.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너를 잃는 게 두려웠고, 그랬기 때문에 안달복달하고 질척거릴 수밖에 없었다. 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겪어온 모든 아픔과 상실감, 비뚤어진 자아까지도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이게 관계를 이어나가기에 영리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행동한다.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연애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건 대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유일한 정통성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나는 너를 기다려온 게 아니라, 실은 그동안 만날 사람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기다림 당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못했다. 다 잊고 깨끗하게 새 출발을 하지도 못했고, 너에 대한 마음을 지켜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미친 척하고 전화를 걸어서 내 할 말 다 쏟아내 버린 다음에 끊어내지도 못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려 노력했던 적도 있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라도 너를 기억하려 애썼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구석에 끼어버린 범퍼카처럼 제자리에서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