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니
친구들과 코인 노래방에 갔는데 한 친구가 윤종신의 [좋니]를 불렀다.
좋아 정말 좋으니. 딱 잊기 좋은 추억 정도니.
난 딱 알맞게 사랑하지 못한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일 뿐.
스쳤던 그런 사랑.
문득 의문이 들었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이별을 해 본 남자라면 누구나 다 안다. 아니, 안 해봤어도 알 것이다. 중학교 때 좋아하던 친구가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버렸을 때,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군대에 갔을 때. 지금은 내가 너무나 부족한 남자라서 이렇게 네 주위만 맴돌지만 언젠가는 너에게 어울리는 멋진 남자가 되어 당당히 네 앞에 서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때까지 어떤 유혹에도 이 마음 변치 않겠다는 다짐 한 번 안 해본 남자가 있을까. 반면 여자는 돌아서면 얄짤 없다. 헤어진 연인에게 술 마시고 전화하거나 집에 찾아가거나 장문 카톡을 보내는 100명 중 99명은 남자고, 그런 연인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100명 중 99명은 여자다. 그래서 남자들은 이런 류의 노래를 좋아한다.
천 년이 가도 난 너를 잊을 수 없어. 사랑했기 때문에
- 박완규 [천년의 사랑]
내가 아닌 그댄 행복한가요 혹시나 내 이름 벌써 잊었나요
내 아름다운 사람아 여전히 나는 네 모습인데
또 다른 사랑 배워갈 그대 가슴에 내 작은 기억 하나만
- 얀 [그래서 그대는]
그런데 정말일까? 정말로 남자가 더 사랑하고, 여자는 덜 사랑해서 남자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걸까.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좋았던 기억은 모두 네 탓, 안 좋았던 기억은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자신을 혐오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질질 짜기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그리워한다고 네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날 끊임없이 마모시켜서 더 어둡고, 의기소침하고, 멋없는, '너'에게 안 어울리는 남자로 만들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개팅도 나갔고, 나이트 클럽에도 갔다. 그런데 다 실패했다. 그것도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못생기고 한심한 여자들한테. '너'에게 다시 돌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던 여자들이 감히 날 찼다. 그래서 더욱 더 네 생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엔 500원 아끼려고 치즈돈까스 안 먹고 등심돈까스 먹던 주제에 나이트 가서 십만 원씩 쳐바르고, 막내 이모뻘인 여자에게 너무 예쁘다 아양 떨면서 술 따르고 재롱부렸는데 다 실패하고, 새벽 4시에 친구들이랑 순대국 먹으면서 첫 차 기다리고 있는데 씨발, 전 여친 생각이 안 나면 그게 사람인가.
여자는 아니지만, 내가 여자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얼굴은 잘 모르겠지만 몸매는 괜찮았을 것이다. 아마 목소리도 예쁘지 않았을까 싶다. 발랄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순딩순딩했겠고,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었겠지. 그랬다면 어땠을까. 딱 그 정도의, 여신급은 아니지만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면. 아마 휴대폰 상단 메뉴에는 면접스터디에서 만난 어떤 오빠, 같은 회사의 어느 대리님, 같은 동아리의 어떤 남자 선배가 보낸 카톡들이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든다면 읽고 답장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직 안했을 것이다. 그러고 있다가 기분 전환도 할 겸 홍대나 강남에서 동성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신다면 어땠을까. 아마 옆 테이블 남자들이 우리 테이블을 힐끔힐끔 거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중에 제일 잘 생긴 남자가 와서 말을 걸어왔을 것이다. 기분이 내킨다면 적당히 받아주고, 아니라면 둘끼리만 할 얘기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남자는 실례했다며, 재미있게 놀라며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설 것이다. 만약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클럽이나 나이트에 간다면 어땠을까. 20대라는 사실만으로도 박수 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어떻게든 내 비위를 맞추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오천 원을 내고 15만 원 짜리 술을 마실 수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그 만오천 원도 안 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그중에 괜찮은 남자도 하나 쯤 만날 것이다. 그러면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 친구'쯤은 흔적도 없이 잊힐 것이다.
결국 다 똑같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 아무리 많이 사랑했어도 다른 사랑이 찾아오면 다 잊힌다.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잊힌다. 다만 나와 너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너'에겐 그 사랑이 쉽게 찾아오지만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에겐 그렇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